밤 10시가 넘어서 공연이 끝났지만 여성 팬들은 귀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날 공개방송을 찾은 팬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일산이 아닌 다른 지역 학생들로 서울을 비롯해 부평, 인천 등 상당히 먼 거리에서 온 이들이다. 때문에 귀가 길을 재촉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벤을 타고 떠나는 가수들의 배웅까지 마친 뒤에서야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기 가수들의 주위를 맴도는 열성 팬들. 때로는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질 만큼 광적인 그들의 모습에 기성세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팬들은 자신들의 모습도 하나의 ‘문화’이며 ‘취미생활’이라고 기성세대의 편견 어린 시선을 경계했다. 이에 <일요신문>에서는 현재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동방신기’의 열성 팬들의 동선을 함께 쫓으며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지면으로 옮겨본다.
지난 8일 오후 4시경 기자는 동방신기의 소속사인 압구정동 소재의 SM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찾았다. 동방신기를 가까이서 만나기 위해 몰려든 팬들이 상주한다는 SM 사무실 주변에는 실제 50여 명의 팬들이 몰려 있었다.
올해 대학 신입생이라는 김지연양(가명·20)은 동방신기를 따라다니는 과정에서 가까워졌다는 또래 친구 네 명과 함께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방신기의 사진으로 만든 대형 퍼즐 액자를 선물로 준비한 채.
“우리는 ‘공방 뛰는 친구들(각종 공개방송을 찾아 스타를 응원하는 이들)’로 오늘은 특별히 선물을 직접 전해주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김 양은 “평소에는 20여 명 정도가 사무실 주변에서 기다리는 데 오늘은 동방신기의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 우리와 같은 ‘공방’ 친구들이 몰려 사람이 많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팬들은 자신들을 ‘공방 뛰는 친구들’과 ‘사생활 뛰는 친구들(숙소와 사무실, 미용실 주변에서 스타를 기다리는 이들)’로 구분했다.
교복을 입고 동방신기를 기다리던 장소현양(가명·17)과 친구들 네 명은 낮 1시쯤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제발 어두워지기 전에 동방신기가 오길’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동방신기의 스케줄이 없고 시험이 끝나 학교도 오전 수업만 하는 오늘 같은 날이 절호의 찬스”라며 자신감에 넘쳐있던 장양은 저녁 7시가 넘어서자 조급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결국 8시30분이 넘어도 ‘우상’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쉬움만 남긴 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하지만 김양의 일행 가운데 두 명만이 집으로 향했고 김양을 포함한 세 명은 다시 동방신기가 나오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2의 기다림을 시작한 이들은 김양 외에도 20여 명이나 됐다. 대부분 ‘사생활 뛰는 친구들’로 주변 편의점에서 사온 빵과 김밥 등으로 허기를 채우며 그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네 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동방신기보다 먼저 매니저가 나와 팬들에게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매니저의 다그침에 도망치는 팬들의 얼굴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매니저가 집에 가라고 얘기하는 것은 곧 동방신기가 나온다는 신호라는 게 이들의 설명. 실제 5분쯤 지나자 동방신기가 사무실에서 나와 밴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이번에는 멤버들이 잠시 손을 흔들어 줬고 이에 팬들은 열광적인 반응으로 화답했다. 이때가 새벽 1시30분.
9일 오전 11시경 KBS에 도착한 기자는 방송국측이 <뮤직뱅크> 방청권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대기 장소에서 김양을 다시 만났다. 새벽 2시쯤 기자와 헤어졌던 김양 일행 세 명과 전날 밤 먼저 집으로 향했던 두 명까지 모두 다섯 명이 다시 모여 있었다.
전날 밤 김양 일행 세 명은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새벽 4시30분에 PC방에서 나온 이들은 압구정 지하철역에서 대충 세수를 한 뒤 첫 차를 타고 새벽 6시가 조금 넘어 이곳에 도착했다고. 그리고 다시 5시간 넘게 방청권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보다 먼저 온 팬들도 10여 명이나 되고 11시경에는 이미 1백여 명 가까운 팬들이 모여 있었다.
또 다른 기다림의 끝은 낮 1시30분쯤 팬클럽 임원이라는 20대 중반의 여성이 도착해 번호표를 나눠주면서 일단락됐다. 순서대로 앉아있는 팬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준 임원이 3시30분에 다시 모이라고 얘기하자 비로소 이들은 식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 기자가 방청권을 얻기 위해 방송국 앞에서 기다리는 동방신기 팬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 ||
대기실을 둘러보고 나오는 기자에게 한 여성 팬이 다가와 “KBS 직원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왔다. 이들은 대기실 출입이 가능한 KBS 직원에게 부탁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을 시도중이었다. 그런데 사연이 너무 딱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이희영양(가명·18)은 친구 두 명과 함께 동방신기를 보기 위해 무작정 상경해서는 여의도 KBS로 직행했던 것. 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데다 어디에 줄을 서야할지도 모르는 터라 번호표를 받지도 못했다. 게다가 저녁 10시 기차를 예매해 놔 동방신기가 나오는 모습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뮤직뱅크>는 8시에 끝나지만 이날 동방신기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10시가 넘어야 방송국을 떠날 예정이었다).
이에 기자는 동방신기 멤버들의 사인을 받아 이들에게 전해주며 조금이라도 아쉬움을 달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저녁 7시에 시작되는 생방송을 앞두고 팬들의 입장은 6시부터 이뤄진다. 이를 앞두고 5시30분쯤 빨간색 동방신기 풍선을 전달받고 5시50분, 드디어 팬클럽 임원들을 통해 방청권을 전달받았다. 장장 12시간의 기다림 끝에 방청권을 받아든 팬들의 얼굴표정은 ‘로또복권’ 당첨이 부럽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이들과 함께 한 며칠간, 이들을 이해하고자 했던 기자의 의도는 쉽게 성공할 수 없었다. 사실 돈을 주며 시켜도 쉽지 않은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이들에 대한 스타의 반응은 너무나 미약했다.
사회의 변화에는 분명 그 이유가 존재한다. 스타라는 허상에 열광하는 열성 팬들의 모습 역시 이를 조장한 사회의 흐름 때문은 아닌지, 결국 이런 현실을 만들어 놓은 게 기성세대들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