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73년 8월13일 도쿄 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된 뒤 위기를 딛고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의 진실은 발혀질 수 있을까. | ||
하지만 야당에서는 진실위 위원 대부분이 진보성향 인사들이고, 국정원이 과연 제 머리를 깎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반응이다. 또한 앞으로 최장 3년 동안 ‘과거사 정국’이 조성되고 이는 곧 2007년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당의 ‘정략적’ 아젠다 세팅이라는 비난도 나온다. 어쨌든 설 정국 최대 이슈로 떠오른 과거사 논쟁. <일요신문>은 7대 과거사 사건 중 가장 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을 중심으로 의혹 규명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지난 73년 8월8일 일본 도쿄에서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된 사건을 말한다. DJ 납치 사건의 핵심 쟁점 사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 여부다. 이것은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이후락 중정부장에 지시해서 벌어진 사건일 가능성과, 이 전 부장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DJ에 대해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한마디 말만 듣고 과잉충성으로 납치했을 가능성, 이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살펴보자. 이 가설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직접 증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 전 대통령은 사자의 몸이 되어 증언이 불가능하다. 이 전 부장은 현재 당뇨와 중풍 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지난 80년대 자신이 납치를 지시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말이 DJ 납치 사건과 박 전 대통령이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을 연계시키지 않고 이 부장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자신이 납치를 지시했다고 시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뒤 이 전 부장은 직무수행 중 취득한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채 이 사건에 대해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당시 이 부장 바로 아래 라인이었던 이철희 차장보의 증언은 박 전 대통령이 이 사건에 직접 연루됐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는 지난 98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73년 봄 이후락 부장이 남산에 있던 나를 궁정동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김대중이 해외에서 시끄럽게 하니 무조건 데려 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일본 치안 상태가 좋지 않아 당시 중정 간부들이 공작수행이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 부장이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김대중을 데려와.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채근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실행에 들어갔다.”
▲ 중정부장 시절 이후락씨(오른쪽)와 박정희 전 대통령. | ||
DJ 납치가 박 전 대통령 ‘작품’이었다는 또 다른 정황도 있다. 일부 정보관계자들은 DJ 납치 사건에 대해 “당시 특수공작은 대통령의 결재 없이 구두지시로 공작이 진행되고 대통령이 사후보고를 받는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DJ 납치를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이후락의 과잉충성에서 빚어졌고, 박 전 대통령도 ‘시키지도 않은 일’ 때문에 한때 곤경에 처했다는 가설도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먼저 <일요신문>은 지난 98년 2월 제 302호 보도에서 DJ 납치 사건과 관련하여, 박 전 대통령 직접 개입 일변도의 시각에 대해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당시 <일요신문> 취재진은 DJ 납치 사건 때 중정 6국장이었던 이용택 전 의원(11·12대 민정당)의 최초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이용택 전 의원이 중정 6국장에 부임한 때는 73년 5월이었는데 당시 DJ 문제가 정권의 큰 현안 가운데 하나였다. 해외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하고 다니던 DJ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 전 의원은 DJ 납치 사건 발생 20여 일 전쯤 이후락 중정부장의 호출을 받은 자리에서 “이희호 여사와 함께 가서 DJ를 데려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부로부터 그 뒤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20여 일이 지나고 DJ납치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런데 DJ가 동교동으로 생환한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전 의원을 급히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누가 했어.”(이 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목소리에서 정보부가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깔고 있었다’고 밝혔다)
“저는 잘 모릅니다.”
“보안사에서도 안했다고 하는데 아무도 했다는 사람이 없으니 누가 했다는 것이냐. 이번 사건을 이 국장이 철저히 수사해 봐. 누구든 간에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얘기하고.”
박 전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이 전 의원은 즉각 동교동을 방문, DJ를 만났다. 그리고 이후락 부장도 만났다. 이때 이 부장은 “내가 지시했다”며 그 이유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 국장에게 DJ를 데려오라고 지시했을 때는 그가 미국에 있을 때였다. 그가 거절하면 못 데리고 오는 것 아니냐. 그런데 가까운 일본으로 DJ가 왔다. 거리도 가깝고 이렇게 하면 데려올 수 있는 것 아니냐.”
이 말을 들은 이 전 의원은 훗날 “이 여사와 함께 갔다면 아무 일 없이 DJ를 모셔올 자신이 있었다”며 이후락에 대해 매우 서운해했다고 한다.
DJ가 동교동으로 귀환한 일주일 뒤인 8월20일께 이 전 의원은 조사 결과 보고를 위해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 핵심은 ‘이후락 부장이 했다’는 것. 박 전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 “나라를 망치려고 하느냐. 나를 망치려고 하는 짓이냐”라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 지난 2003년 3월 <일요신문>이 단독으로 촬영한 이후락씨의 최근 모습. | ||
DJ 납치를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간접적인 정황도 있다. DJ 납치 사건이 있고 나서 1년이 흐른 뒤 육군의 장군 심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파워는 대단한 것이었다. 현역 군인들이 중정에 파견 근무를 많이 나가있었는데 이들은 진급의 보증수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정에서 ‘리스트’를 주면 육군본부에서는 그냥 “예스”만 할 뿐이었다.
이때 DJ 납치 사건의 핵심 멤버였던 윤진원 중정 해외공작단장이 대령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장군 진급 대상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진급 심사에 참여했던 상당수의 고위장성들이 그의 ‘납치 공작’ 이력을 들어 진급에 반대표를 던졌다. 중정의 거듭된 청탁에도 불구하고 윤 대령은 결국 장군 심사에서 ‘물’을 먹게 된다. 당시 군 내부에서는 “비록 DJ가 박 전 대통령의 정적이긴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야당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납치했던 현장 책임자에게 별을 달아주게 되면 장차 군이 커다란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사건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박 전 대통령은 군 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에 진급 후보자들의 경우 미리 명단을 받아 ‘낙점’ 여부를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만약 박 전 대통령이 직접 DJ 납치를 지시했다면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윤 대령의 진급을 ‘승인’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윤 대령이 ‘시키지도 않을 일’을 저질러 박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나 장군 진급이 되지 않았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박 전 대통령의 배후 여부 외에 또 다른 쟁점도 있다. 먼저 DJ를 오사카항에서 중정 공작선 용금호에 실어 부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고 비행기를 띄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는 자신이 쓴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월간 말 펴냄)이라는 책에서 “이후락은 5·16 이후 미국 CIA가 박정희 주변에 깊숙이 박아놓은 첩자”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충분히 DJ 납치 사건을 인지하고 비행기를 띄웠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DJ는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당시 납치에 개입됐던 용금호 선원들은 ‘엔진룸의 옆 방이라 엔진 가속소리를 비행기 소리로 들었을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위의 모든 증언이나 정황들이 사건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널뛰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진실 찾기도 지난한 길이 될 것이다. 또한 7대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은 당사자들의 증언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칫 용두사미의 비극을 초래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