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이 레슬리 하워드(위 왼쪽)와 그의 매니저 앨프레드 첸홀스를 톰슨 경감(아래 사진 왼쪽)과 윈스턴 처칠로 착각해 하워드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켰다는 가설이 돌았다.
그는 강한 애국심으로도 유명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4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에 참전하진 못했지만 그는 후방과 전선에서 선전전의 선두에 섰다. 그는 연합군으로의 결속과 나치에 맞서 싸우기를 호소했다. 그는 <핌퍼넬 스미스>(1941)라는 영화를 연출하고 직접 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는 대표적인 안티 나치 스파이 영화였다. 1942년엔 <더 퍼스트 오브 더 퓨>(The First of the Few)를 감독하고 역시 주연을 맡았는데,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라는 전투기를 개발했던 영국의 엔지니어 R.J. 미첼의 이야기였다. 그는 영화로, 실제 삶에서 연합군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1943년 6월 1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영국의 브리스톨로 향하는 네덜란드 KLM 항공의 777기에 탔던 그는 13명의 승객들과 함께, 독일 공군의 중거리 폭격기 융커스 88에 의해 비스케이 만 상공에서 추락한다. 2차대전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립 지역이었기에, 정기적인 항공 운행은 계속되었다. 비무장 상태였던 777기가 전투기의 공격을 받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독일군은 1942년부터 프랑스 서쪽과 스페인 북쪽에 있는 비즈케이 만을 전략적으로 매우 민감한 지역으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 가끔씩 전운이 감돌긴 했지만, 이토록 갑작스러운 공격은 의외였다. 이후 조사에 의하면, 독일군은 연합군의 전투기로 오인하고 공격했으며 민간 항공기인 777기가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난다는 이야기는 미리 공지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레슬리 하워드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가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독일군이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그 비행기에 탔다고 오인했다는 것이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하워드와 거구의 처칠을 혼동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워드의 매니저인 앨프레드 첸홀스는 얼핏 봐도 처칠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처칠의 보디가드인 월터 톰슨 경감은 하워드와 매우 흡사한 체형이었다. 하워드와 첸홀스가 함께 있는 모습은, 처칠이 톰슨 경감과 함께 있는 모습과 매우 흡사했고, 독일의 정보기관은 777기에 처칠이 탔다고 생각해 전투기로 격추시켰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새끼를 쳤다. 레슬리 하워드의 매니저인 첸홀스는 영국 정부에게 치밀하게 고용된 처칠의 대역이라는 것이다. 즉 영국 정부는 첸홀스와 하워드의 모습을 독일군이 착각할 거라고 미리 예상했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알면서도 비행기를 출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건 암호 해독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2013)에서 알 수 있듯, 영국군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기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를 발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어떨 때는 독일군의 공격을 알면서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암호를 간파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반론이 제기되었다. 전시에 처칠이 무장도 되지 않고 전투기의 에스코트도 받지 않은 채 비행기를 탄다? 독일 정보기관이 그런 멍청한 추론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타깃은 레슬리 하워드였으며, 그는 사실 영국군의 스파이였다는 음모론이 나왔고, 그는 처칠의 지령을 받고 프랑코 총통을 만나 연합군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스페인에 갔다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사를 당했다는 설명이 붙었다. 나치의 문화 선전을 담당했던 요제프 괴벨스는 작전의 중심. 그는 평소 레슬리 하워드를 연합군 쪽의 가장 위험한 프로퍼간다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암살당한 가장 큰 이유를 영화로 든 사람도 있었다. 하워드는 유태인이었고 <핌퍼넬 스미스>(1941) 같은 영화는 나치에 적대적인 입장과 함께 유태인들을 살리자는 테마를 담고 있었다. 이런 영화를 직접 감독까지 한 상황에서 독일군에 의해 그는 타깃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더 퍼스트 오브 더 퓨>의 실제 인물인, 엔지니어 미첼로 오인되어 암살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얘기도 있었다. 미첼은 전투기 개발로 영국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 하지만 그는 이미 1937년에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한 명의 뛰어난 배우는 전시의 포탄 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