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 합성=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외주제작사의 로비 관행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다만 문건이 공개됨으로써 밖으로 알려지게 된 것뿐이라고. 그러나 이에 대해 ‘관행’이라고 규정 짓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외주제작사 및 방송사 관계자들로부터 이번 사안에 대한 입장을 전해 듣고 그들이 말하는 ‘관행’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집중 취재했다.
애초 <한겨레> 신문에 의해 공개된 것은 지난 2003년의 일로 ‘제작부 설날 선물 리스트’에 올라있는 내용이었다. 이 문건에는 지상파 방송국 간부들과 PD, 드라마 제작과 관계된 다른 간부들에게 명절 때 상품권과 선물세트 등이 건네졌으며, 누구에게 얼마가 전해졌는지에 대한 세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문건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심지어 ‘뒷돈 드라마’라는 오명까지 씌어진 외주제작사의 방송제작 시스템에 대해 성토하는 분위기가 이어졌으며,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의 비정상적 관계에 대해서도 되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는 외주제작사의 ‘로비’가 어느 정도인지 사례를 살펴보자.
#1 편성권·판권 따오기 경쟁 치열
업계 관계자들은 외주제작사 로비는 소규모 제작사들의 경우에 훨씬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국내에 드라마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 외주제작사의 수는 20여 개에 이르는 수준. 이 중 ‘빅3’라면 김종학 프로덕션, 초록뱀 미디어, 사과나무 픽쳐스 정도를 꼽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종학 프로덕션은 현재 대작 <태왕사신기>를 준비하고 있으며 9월5일 첫 방송되는 SBS 사극 <서동요>의 제작을 맡고 있다. <올인>과 <불새>를 흥행시킨 초록뱀 미디어 역시 업계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이 외의 소규모 외주제작사들의 경우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방송사의 드라마 편성시간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를 납품해야 하는 외주제작사들의 경우 ‘편성권’을 따내기 위한 다툼은 밥그릇 싸움이나 다름없다. 대형 제작사들의 경우 공신력과 스타캐스팅 파워, 인맥까지 내세워 편성권 싸움에 유리한 고지를 갖고 있으나 소규모 제작사들의 상황은 다르다. 로비가 만연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한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3~4개의 힘 센 외주제작사들이 고정 편성권을 가져가고 나머지 시간대를 두고 편성권 다툼을 하다 보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파워 있는 외주제작사의 경우에도 판권 싸움에는 양보가 없다. 제작비를 지원하는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 판권료 배분은 보통 7:3 정도인데, 외주제작사의 몸집이 큰 경우 6:4로 나누기도 한다. 한류열풍에 힘입어 요즘엔 해외 판권 수익이 크다보니, 이를 두고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형 외주제작사 A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요즘엔 판권료를 모두 가져오기 위해 방송사 제작비를 전혀 받지 않고 제작되는 드라마도 생겨나고 있다. 제작비 부담을 안고 시작하더라도 추가 수익을 더 노리는 경우”라고 전했다.
▲ 대형 외주제작사에서 제작한 드라마들. 위에서부터 김종학 프로덕션의 <패션70s> <해신> <서동요>, 초록뱀 미디어의 <올인> <불새>. | ||
물론 전체 제작사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될 것이나, 로비 관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다고 한다. 한 방송국 관계자는 “전체 제작비 중 10% 정도는 방송사에 주는 것이 ‘관례’로 여겨지고 있는 분위기”라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관계자는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불법도청 문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업계에서는 일반적이며 당연시되는 분위기인데 한번 이슈가 되자 봇물처럼 얘기가 터져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보통 추석, 설과 같은 ‘명절 챙기기’는 일반적으로 상품권 등으로 제공되며, 이 정도는 신생 기획사들도 모두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액수도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다양하다고. 그런데 취재 도중 로비가 단지 ‘금전적’인 것으로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성상납’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 한때 PD에 대한 여배우들의 ‘성상납’이 사회적 문제로 제기된 적도 있었고 이로 인해 처벌된 사례도 있었다. 요즘엔 이것이 신생 외주제작사들의 로비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 방송작가는 “신인 연예인들을 키우는 신생기획사나 외주제작사들의 경우엔 방송국에 ‘잘 보이기’ 위해 여배우들을 술자리에 합석시키고 ‘접대’를 하는 일이 있다”고 털어놨다.
또한 술자리 정도는 그저 친분 도모를 위한 모임으로 여길 뿐 특별히 로비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룸살롱 술자리의 경우 보통 3백만~4백만원 이상이 드는데 이를 아무런 대가성 없는 자리로 생각하기엔 의문의 여지가 많다.
#3 내부용·제출용 영수증 따로
방송사별로 드라마 제작비 규정이 정해져 있는데, 회당 8천만~9천5백만원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 한편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은 이보다 훨씬 많다. 여기에다 스타급 배우들을 출연시키려면 이 제작비로는 배우 개런티를 주기에도 부족할 지경이다.
외주제작사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제작비 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말한다. 외주제작사들은 모자라는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협찬을 동원한다. 더구나 협찬이 잘 되지 않고 제작비 부담이 큰 사극의 경우엔 제작비 부담을 해결하고 수익을 만들어내기 위해 광고유치 등의 방법에 더욱 심혈을 쏟는다.
규정상 외주제작사에서는 제작비가 남을 경우 방송사에 반환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제작비가 남는 경우는 거의 없고, 만약 남더라도 ‘남지 않도록’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외주제작사들은 영수증을 별도로 만드는 편법을 자행한다. 하나는 ‘내부용’, 그리고 또 하나는 ‘방송사 제출용’이다. 한 관계자는 “만약 돈이 남을 경우엔 영수증을 조작해서라도 액수를 맞춘다. 대부분 제작비 지원이 모자라는 판에 설사 돈이 남았다고 해도 고스란히 되돌려주겠느냐”고 털어놨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간의 제작비 처리 문제는 ‘투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주제작사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협찬사에게도 ‘잘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제작비 문제를 주로 협찬으로 해결해야 하므로, PPL(Product Placement, 특정한 상품을 영화나 방송 속의 소도구로 이용해 일종의 광고효과를 노리는 것) 담당자는 협찬을 따내기 위해 협찬사들한테도 로비를 할 수밖에 없다. 한 외주제작사의 PPL 담당자는 “방송사와 시청자들은 간접광고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하지만 외주제작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욕을 먹으면서도 협찬사들에게 매달려야 하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한 방송국 관계자는 이번 사태에 대해 또 다른 얘기를 덧붙였다. “제작비가 한없이 치솟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 문제가 된 스타권력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배우 개런티가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로비도 문제지만 로비를 해야 하는 외주제작사의 여건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