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4일 ‘성완종 리스트’ 수사 관련 이완구 전 총리가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고등검찰청에 출석하자 취재진들이 열띤 경쟁을 펼치고 있다. 박은숙 기자
그동안 수사팀은 온갖 수사(修辭)를 동원해 금품 공여자가 없는 수사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했고, 언론은 치열한 취재 경쟁 속에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참고인을 빼돌리기도 했다. 돈 전달 방식을 놓고 ‘비타500’에 얼마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시뮬레이션을 하는 검찰이나 언론이 나오는가 하면, 대상포진에 걸린 검사가 쉬지도 못하고 80여 일을 수사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 검찰의 화려한 수사들
성완종 리스트 수사 초기 언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검찰의 수사(레토릭)를 통해 사건 진행 상황을 짐작하는 것이었다. 금품 제공 시점과 장소 등을 복원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 같은 레토릭으로 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첫 시작은 수사 초기 “망망대해에 돛 하나 달고 등대를 찾는 심정”이라는 표현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귀인(貴人)을 기다린다”, “기초공사를 마무리하는 단계이고 기둥을 세워 서까래를 올려야 하는데 기둥을 하나씩 세우다 균형이 안 맞으면 다시 기초공사를 해야 한다”, “산에 가면 기둥이 2개인 일주문(一柱門)도 있더라”, “건물에 있는 여러 계단을 오르는데 어떤 분들은 3층에 있고 어떤 분들은 1층 기초공사에 있다” 등 수많은 레토릭이 이어졌다.
처음엔 반응이 괜찮았다. 망망대해, 등대, 기둥, 귀인 등의 표현이 제목으로 뽑혀 보도될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 사건의 진행 과정은 함묵한 채 수사팀이 레토릭만 계속 나열하자 검찰 안팎에서 불만이 쏟아졌다.
특히 4월 말쯤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기둥’이 언급되자 김진태 검찰총장이 화를 냈다는 후문이다. 김 총장은 당시 “수사와 관련된 팩트(사실)만 전달하면 되지 왜 말장난을 하느냐”며 레토릭 사용을 자제할 것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수사팀 내에서도 이때부터 ‘기둥’ 등에 대한 언급이 줄어들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당시 “사실 수사와 관련해 미사여구나 상징적 표현은 몇 년에 한번 하거나, 아니면 1년에 한번 정도면 족하다”며 “레토릭이 지나치게 많을 때는 수사의 본질을 흐릴 수 있고 그 레토릭에 비해 수사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더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과열된 취재경쟁
성 전 회장의 최측근인 이용기 전 비서실장은 지난 4월 23일 새벽 1시 53분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다 A 언론사에 의해 빼돌려졌다.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사 앞에서 기다리던 기자단과 일문일답을 주고받던 이 전 실장은 A 사의 차량에 사실상 구겨 넣어졌다. 이 전 실장이 조사를 받고 나올 때부터 A 사 기자는 그의 손을 잡고 장사진을 치고 있는 다른 언론사로부터 보호하려는 모습이 사뭇 경호원과도 같았다.
기자들이 몰려들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A 사의 다른 기자는 이 전 실장이 차에 타자마자 곧바로 출발했다. 그 순간 당초 이 전 실장의 손을 잡고 차로 유인했던 기자가 탑승하지 못해 차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며 뒤따라 뛰는 등 당시 상황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이후 서초동 내에선 “내일쯤 A 사에서 특종을 보도할 것 같다”는 관측이 돌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관련 특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실패한 참고인 빼돌리기’였던 것이다. 이후 실제로 이 전 실장이 A 사와 차를 타고 가면서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법조계 관계자는 “정식으로 조사를 받고 나온 참고인을 특정 언론사가 빼돌리는 것은 상도의에 맞지 않다”며 “너무 취재 경쟁이 과열되다보니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게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 돈 전달 방식 화제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불법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수사할 때 최대 화제는 돈 전달 방식이었다. 처음엔 한 언론 보도를 시작으로 ‘비타500’ 상자에 3000만 원을 넣어 전달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비타500의 주가가 껑충 뛰어올랐고 불티나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현금 3000만 원을 비타500 박스에 넣어본 모습. 연합뉴스
수사팀도 일선 은행의 협조를 받아 비타500에 1만 원권 지폐와 5만 원권 지폐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시뮬레이션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검찰 내에선 “예전에는 박카스 박스에 담아 전달했는데 그게 이제는 비타500으로 바뀌었느냐”며 “박카스 박스에는 딱 1억 원이 들어가는데 비타500에는 얼마나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 다음 일부 언론에서 비타500이 아닌 노란 봉투였다고 하자, 다른 언론사들이 앞 다퉈 “비타500도, 노란봉투도 아닌 쇼핑백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당시 “비타500 박스 관련 진술은 없었고 쇼핑백이 맞다는 언론보도도 100% 맞지는 않다”는 입장이었다.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한 지난 2일에도 “돈 전달 방식에 대해선 알려줄 수 없다”면서 확인을 거부해 기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김근호 언론인
문무일답지 않게 마무리한 까닭 사법처리 수위 청와대와 갈등? 문무일 검사장 검찰 내에선 이 문제를 놓고 한동안 말들이 무성했다. 우선 별다른 성과 없이 수사가 끝나면서 본인이 직접 설명할 정도로 열의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일각에선 사법처리 수위 등을 놓고 검찰 수뇌부나 청와대 등과 물밑 조율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었다. 문 검사장이 그동안 일처리를 해온 스타일을 감안하면 의견이 서로 다를 경우 마찰까지 불사하지는 않겠지만 이견을 굳이 숨길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검찰 고위 관계자는 “본인이 굳이 추가 설명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간단한 사안이라고 생각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런 설명을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며 “어느 쪽이든 문 검사장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