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지난 7일 대전지검 특수부(부장검사 이혁)는 5·31지방선거에서 평택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 A 씨의 선거운동을 돕고 금품을 받은 14명의 연예인을 불법선거운동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했다. 그런데 이들 연예인에게 금품을 건네며 선거운동을 돕게 한 장본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조직폭력배(조폭)였다. 이렇게 ‘연예인’ ‘조폭’ ‘정치인’이 연루된 영화와 같은 사건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매일 교체되는 탤런트 동반, 이번 선거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정말 의문이다.’ 이 글은 평택시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한 네티즌이 5·31지방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한 내용 중 일부다. 그는 지난 5·31지방선거 과정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혹을 언급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명 탤런트가 대거 선거운동에 참여했다는 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5·31지방선거 당시 평택시에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 촬영 현장보다 더 많은 연예인이 집결했다. 그것도 평택시 전체가 아닌 시의원을 뽑는 한 선거구에 총 17명의 연예인이 투입돼 어지간한 대통령 선거 유세를 능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당연히 그 후보가 분위기를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TV를 통해 친숙해진 중년 탤런트부터 출중한 외모의 여자 연예인까지 다양한 연예인이 돌아가며 선거운동에 참여하니 유권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시의원에 당선된 A 씨와 같은 지역구에서 시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한 다른 후보가 회상하는 당시 분위기다. 이들이 맞붙은 선거구에서 가장 치열한 선거운동이 벌어진 곳은 두 군데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지방선거의 경우 광역단체장부터 기초의회의원까지 모두 4개의 선거가 동시에 치러져 한 명의 유권자가 살펴봐야 할 후보는 모두 합쳐 수십여 명에 이른다. 특히 가장 관심이 덜한 기초의회의원인 시의원 출마 후보자의 경우 자신을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평택시에서 이번에 문제가 된 시의원 지역구에선 광역단체장인 경기도지사 선거보다 시의원 선거 분위기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물론 이는 17명의 인기 연예인이 선거운동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당시 분위기에 대해 평택시민신문 김기수 편집국장은 “문제가 된 지역구에는 유난히 시의원 후보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했다”면서 “연예인의 선거운동 참여 자체는 워낙 흔한 일이라 특이할 게 없으나 너무 많은 연예인이 동원된 게 이채로웠는데 결국 문제가 야기되고 말았다”고 얘기한다.
김 국장의 설명처럼 당시 뜨거웠던 평택시의 연예인 열풍은 지방선거가 끝나고 5개월가량이 지난 최근 시점에 한국 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든 이슈로 거듭났다. 검찰 수사를 통해 선거운동에 참여한 17명의 연예인 가운데 금품을 받은 14명이 불법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것이다. 문제는 엉뚱한 곳, 평택이 아닌 대전교도소에서 발발했다.
5·31지방선거가 끝나고 2개월여가 지난 뒤인 지난 8월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전 아무개 씨가 휴대폰을 소지하고 있다가 대전지방교정청 특별수검반에 의해 적발됐다. 전 씨는 조폭 출신으로 살인죄 등으로 22년 6월을 선고받아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휴대폰 소지로 시작된 수사는 점차 확대됐다. 우선 그에게 휴대폰을 전해준 이 아무개 교정감이 직무유기 혐의로 약식기소됐고 교도관에게 돈을 건넸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오락실 사업에 개입하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그리고 검찰은 연예인 14명이 동원된 불법 선거운동의 실체까지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수사를 담당한 대전지검 특수부 이혁 부장검사는 “광복절 가석방 대상자였던 전 씨가 출감 뒤를 대비해 여러 가지 이권사업에 개입하려 했다”면서 “조사 과정에서 그가 5·31지방선거에 깊이 관여했음이 밝혀져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추가기소하게 됐다”고 밝힌다.
전 씨와 당시 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A 씨는 고향 선후배 사이로 전 씨는 출소 이후 이권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A 씨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전 씨가 교도소 안에서 A 씨와 여러 차례 통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 씨는 자신의 조직원인 이 아무개 씨를 통해 경기 지역 폭력조직 두목 안 아무개 씨에게 연예인을 동원해 A 씨의 시의원 선거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에 안 씨는 S 연예기획사 대표 박 아무개 씨에게 선거운동을 도울 연예인 동원을 부탁했다. 검찰에 따르면 안 씨가 사례는 물론이고 해당 연예기획사에 투자까지 약속해 박 씨의 적극적인 연예인 동원을 유도했다고 한다. 이에 박 씨는 인기 중견탤런트 13명과 개그맨 1명을 동원해 A 씨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대략 10여 일 동안의 선거운동 기간에 이들 연예인이 돌아가며 선거운동에 참여했는데 해당 연예인들은 시의원 후보의 사무실 게시판이나 선거 벽보에 ‘당선을 기원합니다. ○○○’라고 사인을 해주고 함께 거리유세에 나서 유권자들을 만났다.
물론 연예인이 정치인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다만 정해진 실비 이상의 비용을 받고 선거운동에 참여하면 이는 공직선거법상 매수 및 이해유도 등의 혐의로 처벌받게 되어 있다. 해당 연예인 14명은 두 시간가량 선거운동을 도와준 대가로 1인당 150만~200만 원의 금액을 받았다. 전 씨는 안 씨를 통해 연예기획사 대표 박 씨에게 모두 2800만 원을 건넸고 이 돈이 14명의 연예인에게 분배된 것이다. 확인 결과 A 씨의 시의원 선거에 참여한 연예인은 모두 17명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3명은 금품을 받지 않고 선거운동에 참여해 수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결국 14명의 연예인과 이들을 동원한 박 씨는 불구속기소됐고, 안 씨는 구속기소, 그리고 전 씨의 지시를 안 씨에게 전한 이 씨는 수배 중이다. 조폭이 제작비 2800만 원을 들여 14명의 연예인을 주연으로 출연시킨 ‘불법 선거운동’이라는 한편의 영화 같은 사건이 검찰을 통해 관계자 전원 형사입건으로 마무리된 것. 다만 해당 시의원 A 씨는 연예인들에게 금품을 건넨 정황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해 기소 대상에서 제외됐다.
“해당 연예인들은 그런 행위를 팬 사인회와 같은 이벤트 정도로 생각할 뿐 범죄행위라는 인식은 거의 없었다”는 이 부장검사는 “이를 가만두면 앞으로도 공명선거에 문제가 될 수 있어 연예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전원 형사입건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또한 “해당 연예인들은 연예기획사 대표인 박 씨를 통해 섭외돼 그 뒤에 조폭이 관련됐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던 것 같다”고 한다.
연예인의 사회 참여가 두드러지면서 자신의 유명세로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공개 지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더 이상 연예인들이 이런 분위기를 악용, 공정해야할 선거를 돈벌이 이벤트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