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가 환자에게 침술을 놓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연합뉴스
지난 12일 한국환자단체연합회가 개최한 제16회 ‘환자샤우팅카페’에 자문위원으로 참석한 국립중앙의료원 권용진 기조실장이 던진 말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유일한 미성년자이자 “진료실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정 아무개 양(15)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였다.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을 알려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에 무대에 올라 이름도 밝히고, 진료실에서 겪은 추행에 대해 말할 용기를 냈다고 했다.
정 양은 지난 2013년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후 허리에 통증을 느끼는 등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자, 같은 해 8월 어머니 지인의 소개로 한 한의원을 찾았다. 처음 어머니와 함께 찾았을 때 한의사는 침이나 뜸처럼 여느 한의원에서 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치료를 해줬다.
그런데 한의사는 이상하게도 종종 정 양에게 누구랑 같이 왔는지를 물었다. 혼자 왔다고 대답한 날이면 커튼을 치고 “침을 놓기 전 근육을 풀어주는 수기치료(손을 이용해 혈을 누르는 치료법)”라며 엎드려 있는 정 양을 바로 눕게 했다. 진료실엔 정 양과 한의사뿐, 간호사는 없었다. 한의사는 정 양의 바지를 직접 벗겨주거나 치마를 들춰 봤다. 그리고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정 양은 한의사의 행동이 불쾌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 양이 한 것이라고는 ‘이것도 치료야’라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던 것이 전부였다.
지난 2013년 8월 10일부터 9월 28일까지, 총 17번의 진료 중 7차례의 수기치료를 받은 정 양은 ‘이상한’ 진료가 계속되자 한의원에 가는 게 꺼려졌다. “다음에 엄마랑 갈 때 엄마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버텼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정 양의 어머니는 “장애인이 돼도 엄마는 책임 못진다”며 화를 냈다. 결국 정 양은 그동안 한의원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에게 모두 털어놨고 한의사를 형사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2월 5일 열린 공판에서 재판부는 정 양의 진료를 담당한 한의사에 대해 “의심스러운 정황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해당 한의사에 대한 판결은 ‘무죄’였다. 재판부는 “한의사가 수기치료를 빙자해 추행한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들긴 한다”면서도 “성기를 만진 것이 수기치료의 과정으로 볼 여지가 있고, 고의적으로 만진 것으로 증명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성기 부근과 가슴을 손으로 만지는 수기치료법이 의학 서적에 나오는 만큼 정당한 의료행위로도 볼 수 있어, 추행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정 양의 사례와 비슷한 판례들은 또 있다. 정 양과 같이 환자들은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의료행위였다”는 의사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5월 경기도 수원의 한 40대 한의사는 13세 여중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가 지난 2013년 2월부터 두 달간 성장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한의사는 “임상 경험으로 터득한 개인적 치료 방법”이라며 청바지 지퍼를 내리거나 치마를 들춰 속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1심 재판부는 해당 한의사에 대해 “의학적 근거 없이 개인적 치료방법이란 핑계로 중요부위를 눌렀고 보호자도 치료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며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그런데 2심에서 형량이 줄었다. 해당 한의사의 “치료 목적이었다”는 주장이 인정된 것. 2심 재판부는 “침을 놓기 위해 속옷을 약간 들어 올린 것은 치료행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결국 한의사에게 징역 1년, 성폭행 교육 프로그램 40시간 이수가 내려졌다.
인천의 한 소아과 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지난 2013년 4월, 의사(당시 36세)는 변비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여중생을 진찰하는 과정에서 성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이 의사는 양다리를 벌려 의자에 앉은 여중생의 무릎에 자신의 성기를 밀착했고, 그녀를 침대에 눕힌 후 속옷 속까지 손을 넣어 눌렀다. 1심 재판부는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항소심 재판부는 A 씨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진료에서 의사의 행위가 환자의 인식 여하에 따라 추행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면서도 “가능한 많은 부위를 진찰할수록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있어 복부 촉진(접촉 또는 진료)은 필요하며, 이상소견이 있거나 예상되는 반응이 없을 때는 범위를 넓혀 확인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시했다.
앞서의 세 사건에 대해 공통적으로 재판부는 추행 정황에 대해서는 강한 의심이 든다면서도 무죄를 선고하거나 형량을 줄였다. 그 이유에 대해 일각에선 “의료와 성추행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몸에 대해 말하고 신체 접촉이 이뤄지는 의료 행위 특성상, 진료와 성추행의 경계를 구분 짓기 힘들어 법원에서도 유무죄를 가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한국환자단체연합회가 개최한 ‘환자샤우팅카페’에 여중생 정 아무개 양이 참석해 진료실에서 겪은 추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실제로 진료와 성추행에 대한 특별한 기준은 없다. 단지 각 의료단체의 지침이나 윤리교육,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9월 발간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 안내서> 등이 가이드라인으로 제시 됐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권고에 불과하다.
결국 명확한 기준도 없고 이를 법원에서조차 가리는 게 어렵다보니 환자들은 불쾌한 일을 당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료 과정에서 전문성을 가진 의사에게 상대적으로 의학 지식이 부족한 환자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의 정 양도 이와 같은 이유로 7차례의 ‘이상한’ 수기치료를 참았다.
이 때문에 의사가 환자에게 진료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하는 절차를 의무화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진료 과정에서부터 왜 이런 진료가 필요하고 어떻게 진료할 것인지 미리 설명하고 동의하는 절차만 있어도 법정 다툼까지 이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최근 이러한 내용의 ‘진료빙자성추행방지법’ 입법청원 운동에 나섰다.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이와 관련한 의료법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추진 중인 이 법은 의사, 한의사 등 의료인이 민감한 신체부위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위를 진료할 때 환자에게 진료 신체부위, 진료 이유, 거부권 등을 미리 알리는 것을 의무화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환자의 피해를 미리 방지하고, 동시에 거짓 고발을 당할 수 있는 의료인도 보호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의료계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이 법이 의사와 환자 간 불신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강청희 부회장은 “입법 취지에는 십분 공감한다”면서도 “진료 빙자 성추행은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과잉 규제가 우려돼 법을 제정하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강 부회장은 “의료행위 특성상 신체 접촉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직접 신체접촉을 하든, 의료기기를 쓰든, 접촉하지 않고 진료를 하면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를 법으로 제재하면 진료가 더 위축될 우려가 있다”며 “특히 의식이 없는 응급상황에서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문제를 일으킨 의사는 일부이고, 현행법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히 있다”며 “이미 협회 차원에서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윤리 교육을 강화하고 자율적으로 처벌 규정도 마련하는 등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한한의사협회 관계자도 “아직 입법 추진에 대해 내부적으로 논의한 바는 없다. 수기치료와 같이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치료를 할 경우 환자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라는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회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간호사나 보호자를 대동하는 것도 권고 사항”이라며 “부적절한 행위를 한 한의사들을 대상으로 윤리위원회를 열어 처벌을 하는 규정도 이미 마련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정 양 사건의 경우 사전 고지를 제대로 하고 동의하는 절차만 지켰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라며 “진료빙자성추행방지법은 이러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예방 차원이지, 의사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보거나 사후 처벌용 등으로 청원하는 법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안 대표는 “최근에는 의사의 성추행 수사가 가해자보다는 피해자 진술 중심으로 진행되다 보니 명백한 진료 행위라도 환자가 의사를 오해해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며 “이러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의료인이 민감한 신체부위를 진료할 때 의무적으로 환자에게 사전고지를 하고, 간호사나 보호자 등 제삼자를 배석시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병원에서 겪은 불쾌한 접촉 브래지어 속 청진기 진료일까 추행일까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월 발표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기준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최근 5년간 의료기관을 이용한 성인(19~59세) 여성 1000명 중 118명이 성적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해당 의료인에게 즉시 이의를 제기하거나 병원 책임자에게 조치를 요구하는 등 적극 대응한 사례는 22%에 불과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진료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라는 응답이 46.9%로 가장 많았다. ‘적극적으로 대응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라는 응답이 30.2%로 뒤를 이었다. 보고서는 환자와 의사의 인식 차를 갈등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 의사가 정당한 의료행위를 해도 상대적으로 의학적 정보가 부족한 환자가 오해할 수 있다는 것. 보고서를 보면 ‘내과 의사가 청진기 진찰을 하던 중 사전 설명을 하거나 환자 동의를 구하지 않고 옷 안에서 브래지어를 들어 올려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대는 경우’에 대해 의사 56%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했지만, 환자는 76.1%가 성희롱이라고 답했다. ‘성인 여성 환자가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에 방문했을 때 응급실 의사가 환자에게 성경험 여부나 최근 성관계한 시기를 물어보는 경우’에는 의사 9.5%, 환자 43.3%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답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 관계자는 “인권위에 ‘진료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진정이 접수돼도 무죄가 나온 법원의 판결처럼 기각되는 사례가 많았다”며 “실제로 부당한 접촉이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환자가 의사로부터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지 못해 정당한 의료행위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전했다. 국가인권위는 이러한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등에서 활용 중인 ‘샤프롱(Chaperone)’ 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샤프롱은 진료실이나 검사실에서 여성이나 미성년 환자, 정신지체 환자 등을 진료할 때, 가족·보호자·간호사 등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 환자를 안심시키고 진료 중 발생할 수 있는 성범죄 등의 행위를 방지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쉽게 말해 신체접촉이 불가피할 경우 간호사 등이 동반한 상태에서 진료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