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혹의 소나타를 부르던 아이비가 무대 아래에서 순진한 표정으로 “아이를 낳을 몸이라 술과 담배를 못해요”라고 말했을 때 남자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자 남자들은 아이비로부터 등을 돌렸다. | ||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소개팅을 하는데 남자가 자리를 뜬 사이 함께 있던 주선자가 콘돔 2개를 슬며시 내 손에 쥐어준다. “오늘은 너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아,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 애인과 헤어지고 ‘연애계’를 떠나 있던 4년 사이 세상엔 뭔가 변화가 생긴 듯하다. 언제 이렇게 급진적으로 변했나. 갓 해동된 1억 년 전 둘리의 기분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동안 뽀뽀라도 하자던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나쁜 놈. ‘일단 자고 시작하는 게 대세다’라고 21세기적 또치와 도우너가 조언한다. 정말 그런가.
또 하나의 상황이 발생했다. 도발적 변신이야말로 연애를 시작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어느 날, 방송에 출연한 서갑숙을 보았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던 그녀는 8년 전의 고백을 후회한다고 했다. 아니, 요즘처럼 개방화된 시대에 왜. 2000년 국내 최초의 여성들을 위한 성인 사이트 ‘팍시러브넷’을 만든 이연희 대표는 또 뉴질랜드로 떠났다. 익명의 대중으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경찰서를 오가는 생활에 더 이상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너의 섹스를 남(男)에게 알리지 말라.’ 결국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런 셈이다.
지구상에서 성담론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지났다. 세기말. O양과 B양의 비디오가 쏟아져 나오고 <노랑머리>니 <거짓말> 같은 문제적 영화들이 나타나며 트렌스젠더가 스타로 떠오르던 그 시기엔 쿨한 게 유행이었다. 섹스에 대한 문제만큼은 마치 당장이라도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할 것만 같았다. 분위기만 보자면 확실히 그랬다. 아마도 서갑숙이나 이연희 대표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 같은 사회적 흐름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성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여자들이 마녀사냥 당하는 모습을. 남자들은 섹시한 여자를 원하지만 그녀가 섹스를 즐긴다는 사실까지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도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아이비의 경우도 그랬다. 그녀가 섹시했던 건 무대 아래서 보여주는 상반된 이미지 때문이었다. 유혹의 소나타를 노래하던 그녀가 순진한 표정으로 통금시간을 운운하며 ‘아이를 낳을 성스러운 몸이라 술이나 담배는 못해요’라고 말했을 때 남자들은 진정 열광했다. 어차피 그 발언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그렇게 믿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데 섹스 동영상에 양다리라니. 무엇이 진실인지는 이번에도 중요하지 않다.
어쨌건 스물여섯의 관능적인 아이비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했다는, 그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분노의 원인일 뿐. 그토록 리버럴하다는 미국에서조차 마찬가지다. 섹스 동영상의 주인공 패리스 힐튼은 여자들에겐 패셔니스타로서 인기 있을지 몰라도 미국 남성들 사이에선 ‘걸레’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그녀가 섹스 한번 하자면. 당연히 달려간다. 하지만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300억 달러의 재산에도 불구하고 왠지 찜찜하다. ‘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여자는 여성적이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다. 고로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독특한 3단 논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섹스에 있어서라면 서갑숙보다 곱절은 파란만장한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는 <킹콩걸>에서 남자가 원하는 건 ‘남자를 사랑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며 두 챕터만 넘어가면 잠자리를 같이하고 네 줄 정도로 섹스를 즐기며 항상 만족해하는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라고 단정 지었다. 남자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귀여운 척으로 통하기엔 공룡 둘리는 너무 늙었다. 더 이상 어리지도 않고 힐튼만큼 돈도 없으며 아이비만큼 섹시하지도 않다. 영악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도 스피디하게.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며 여자친구와의 섹스를 손꼽아 기다릴 만큼 요즘 남자들은 순진하지도 않고 인내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모른다.
성에 관한 담론이 트렌드로 떠올랐던 세기말 이후 확실히 섹스는 은밀하고 화려한 포장을 벗고 자연스럽고 생리적인 일상으로 대중에게 다가왔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섹슈얼한 일상을 드러낸 몇몇 여자들이야 피곤해졌지만 덕분에 남자들은 편해졌다. 이미 여자들이 자신의 입으로 섹스를 즐긴다고 밝혔는데 굳이 애절한 마음으로 그녀와의 첫날밤을 기다릴 이유가 뭐가 있나. 어차피 너도 좋았잖아. 고맙지도 미안하지도 않다. 그리고 여자는 많다. 주변을 보라. 광고 문구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 단, 비르지니가 말한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그에게만 특별하다는 듯이. 그것의 진실 따위야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법이다. 적성에도 안 맞는 내숭이 어쩐지 구차하지만 그렇다고 섹스를 사랑과 별개로 두고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컨트롤 능력도 없다. ‘쿨’한 건 냉장고에서나 찾으라지. 무엇보다 솔직해지기엔 사는 게 너무 피곤하다. 앞서 다른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던 나쁜 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 남자랑 자본 적이 없어서 고민했어요.” 영악한 또치와 도우너의 조언에 따라. 어디야. 그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온다. 30초 만에. 어쩌겠는가. 이미 세상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모순투성이며 조작된 환상인 것을.
앙앙 에디터=이미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