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마다 다른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순재의 바람처럼 ‘야동순재’에서 ‘영조’에 이르기까지 그의 변신은 늘 새롭고도 역할에 꼭 들어맞는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김태진(이하 김): 선생님 전 연예가중계 리포턴데요. <일요신문>에서 제 이름을 걸고 ‘맛있는 인터뷰’라는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강력히 요청을 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이순재(이하 이): 허허. 그래? 그거 고맙구먼.
김: 요즘 선생님께서 출연하고 있는 <이산> 시청률이 높게 나오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이: 상대 드라마(<왕과 나>) 시청률이 좋아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우리 드라마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니까 고마울 따름이에요. 두 드라마가 좋은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근데 두 드라마를 비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한 쪽은 왕조 얘기고 다른 한 쪽은 내관들 얘기잖아. 내용이 다르니까 두 드라마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지.
김: 아무래도 두 드라마의 비등한 시청률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요. 시청률로 드라마를 평가하는 풍토에 대해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실 것 같습니다.
이: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사실 시청률이라는 개념은 원래 90년대 와서 극렬해진 거야.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처럼 드라마를 많이 만드는 나라가 없어요. 방송국이 뭐 탤런트들 먹여 살리려고 개수를 늘린 거겠어? 자체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드라마라서 그렇지. 역설적이야. 어제 대본 받아서 오늘 드라마 찍고 내일 방송 나가잖아. 최악의 조건에서 작품을 만들면서 시청률로 드라마 존폐가 결정된다고. 시청률 올리려고 하면 시아버지하고 며느리, 사위하고 장모를 불륜 관계로 만들면 돼. 욕이야 먹든 말든. 다만 공익성이 있는 방송이 그렇게까지 가면 안 된다고 보는 거지. 보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이나 책임감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
김: 말씀 듣다보니 드라마 업계가 점점 더 악화일로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 다행히 시청자들의 안목이 높아져서 그런 문제는 점점 나아질 거라고 봐요. 한때는 시청률, 시청률 하다보니까 잘못돼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 시청자들에 의해서 고쳐지더라고. 이런 포지션에 이런 캐스팅을 해야 한다는 공식이 무너졌잖아. 결국 평가는 시청자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 같아. 돌아왔지만 점점 본궤도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하고 희망을 갖게 돼.
김: 그런 의미에서 <거침없이 하이킥>은 작품성과 시청률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작품이죠.
이: <하이킥>은 웃기는 목적으로 만든 드라마이긴 하지만 거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잖아. 내가 처음 시트콤을 한다고 했을 때 가족 간의 페이소스를 강조하자고 말했어. 야박하게 상대방을 마모시키고 괴롭히면서 웃기는 게 아니라 정감 있는 코미디를 만들자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성공했지.
김: ‘야동순재’도 선생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 사실 ‘야동’이라는 게 우리 세대에서는 방송에서 다룰 수도 없는 테마였고 설사 그런 경험을 했더라도 겉으로 내색하는 게 거북했어. 난 컴퓨터를 못하기 때문에 본 적은 없는데 처음에는 점잖은 배우 체면에 뭐 그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웃음). 감독이 하라니까 해야겠고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잖아. 난 욕먹을 줄 알았는데 “야 우리 할아버지도 저런 거 보는 구나”하면서 재미있어 하더라고. 노년층을 이해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 같고. 나 역시도 10대라는 그동안 가질 수 없었던 팬을 얻었으니 일석삼조지.
김: <하이킥>도 그렇고 <이산>도 그렇고 드라마에서 많은 후배들과의 작업을 하셨는데요. 선생님이 보는 요즘 후배들은 어떤가요.
이: 기본적으로 후배들은 다 예뻐. 또 우리 때와 다르게 후배들은 사회적 약자로 권력이나 돈에 빌붙어서 따라 다니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됐으니까 그게 고맙지. 다만 조건이 좋아지니까 정신적인 측면이 취약해지는 것 같아. 사실 현장에서 얼굴만 믿고 대사 한 마디 못하는 연기자들이 굉장히 많거든. 물론 역량 있는 친구들도 몇몇 눈에 띄긴 하지만 대부분은 기본 발성부터 안 돼 있어. 얼굴 믿고 갈 수 있는 건 젊었을 때 잠깐이야. 장동건이나 이영애처럼 돈도 많이 벌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그런 스타가 되고 싶은지, 비록 이름은 없지만 예술적인 욕구를 가지고 평생 연기를 하고 살 건지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김: 선생님은 벌써 50년이라는 시간을 연기자로 지내오셨는데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연기자로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였을까 궁금한데요.
▲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 역할을 맡은 이순재. | ||
김: 그럼 연기자로 살아오시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이: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이 나이에 현업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난 만족해요. 고난은 젊었을 때 많았어. 돈을 벌거나 사회적인 대접을 받으려고 이 직업을 선택한 건 아니지만 척박한 사회적 인식 속에서 시작을 했던 터라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들었지. 가족 구성원한테 미안한 마음이 커요. 한때는 영화 4편을 하루에 찍느라 집에 가서 자는 날이 보통 한 달에 닷새, 많아야 일주일이었으니까. 난 지금도 우리 마누라가 얼마를 저축하고 있는지 몰라(웃음). 하물며 내 몫으로 옷을 산 게 하나도 없다니까. 양복점에서 양복 맞춰본 게 일생 동안 대여섯 번 정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