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 차남 김현철씨가 ‘미림팀’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
당사자들이 도청 테이프 내용에 대해 “대재앙”이라고까지 표현했던 것처럼 공씨가 추가로 보관해오던 2백74개의 테이프 가운데 일부라도 공개된다면 정국은 핵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 도청 테이프들 속에 권력과 금력의 추악한 뒷거래, 전·현 유력 인사들의 사생활과 치부 등이 낱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공씨는 자술서에서 더 이상의 테이프는 없다고 밝혔으나 불과 하루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아직도 얼마나 많은 양이 ‘지하’에 숨어있는지 누구도 모른다. 강제 퇴직당한 국정원 전직 직원 가운데 일부와 미림팀장 공운영씨 주변, 그리고 천용택 전 국정원장을 비롯한 김대중 정권 인사들도 상당량의 테이프를 따로 보관하고 있을 개연성이 커지고 있다. 이들이 테이프를 공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검찰 조사과정에서 또 다른 인사의 테이프가 포착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청 테이프가 검찰 손으로 모두 넘겨진다고 해도 그 내용에 대한 보안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누군가의 입소문을 통해 테이프 내용과 관련된 루머가 끊임없이 정치권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면 그 폐해도 천문학적인 규모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조타수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대해 “진실만이 답”이라는 ‘선문답’을 던지고 있다. 과연 도청 X파일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 걸까.
‘미림’(美林)이 대한민국을 완전히 발칵 뒤집어놓고 있다. 마치 군사정권 시절의 고급 요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은밀한 이 이름은 그 분위기만큼이나 실체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미림팀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과거 국가안전기획부 내의 ‘특수도청팀’이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용어는 과거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요정을 가리키는 은어로 사용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즉 과거 60~70년대에는 요정 정치가 발달했는데, 거기서 나온 정보들을 요정 정보라고 하기가 뭣해서 ‘미림 정보’로 불렀을 것이라는 게 현재로선 가장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군사문화의 잔재인 이 미림이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1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엄청난 폭풍우를 몰아 오고 있다. 결국은 군사문화를 청산하겠다고 나선 문민정부가 오히려 더 그 폐해를 마음껏 즐겼고, 그 후폭풍을 지금 고스란히 맞고 있는 셈이다. “미림의 실체적 책임자가 누군지 분명히 가려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 크게 울린다.
미림은 팀장이었던 공운영씨의 자술서 형식의 고백과 전직 안기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공씨는 “92년 상부의 지시에 의해 미림팀이 조직됐고,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체됐다. 그러다가 1년 만인 94년에 다시 부활됐다”고 밝혔다.
전 안기부 직원 김기삼씨도 “94년초 안기부의 인천지부장으로 있던 오정소씨가 대공정책실장으로 부임하면서 (팀이) 재조직됐다”고 밝혔다. 당시 김씨는 오 전 실장의 보좌원을 지낸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미림팀은 안기부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조직이었을까. 기자가 전화로 접촉한 전직 안기부(국정원 포함) 관계자들에 의하면 미림은 안기부의 공식 조직이 아니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안기부 간부 출신의 K씨는 “안기부 자체 조직상 도청을 전담한 부서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미림은 그 부서 소속팀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특수 조직으로 별동부대처럼 가동된 듯하다”라고 밝혔다. 그는 “안기부의 조직 성격상 자기 방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었기에 미림이란 이름을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 성격의 특수팀이 가동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덧붙였다.
미림팀의 실체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한 증언을 하고 있는 김기삼씨 또한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미림은 안기부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인의 사조직 성격”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직제편제상 공 팀장 등 안기부 직원이 미림에 모여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안기부 조직으로 비칠 뿐, 엄밀히 말하자면 안기부 안에 놔둘 필요도 없는 팀이었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로 김씨는 ‘미림 보고서’의 보고 절차와 체계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미림 보고서는 오 실장이 직접 관리했다는 것. 일차 검토한 뒤 별 내용이 아닌 것은 직접 파쇄기에 집어넣고 다른 데에 알려야 할 내용은 ‘위’에 직접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 윗선으로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와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을 들었다. 김씨는 “미림 보고서는 실국장-차장-부장이라는 안기부의 정식 보고 절차를 완전 무시한 권력 실세의 사조직이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도청테이프를 수사하고 있는 검찰측은 “6공 정권과 함께 사라졌던 미림팀을 문민정부 들어서 다시 재구성토록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일차 대상으로 김현철씨가 주목받고 있다. 김씨는 현재 검찰에 의해 출국금지 조치됐다.
공씨는 “미림팀 재구성의 결정적 계기는 김현철씨라고 생각한다”며 “김씨가 오 실장과 연결되면서 재가동됐을 것”이라고 언론에 밝힌 바 있다.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도 “YS 차남 현철씨가 옛 안기부의 불법도청을 지휘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국민일보>는 7월28일 안기부 직원으로 활동했던 국정원 현직 간부 A씨와의 인터뷰를 보도하면서 “당시 오 실장의 (미림팀 재구성) 제안에 김기섭 기조실장이 ‘맞다. 한번 해보자’고 해서 도청팀을 재가동했을 것이다. (오 실장과 김 실장을 통해 정보를 장악했던) 김씨가 핵심인물이자 주동인물로 보면 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의혹의 중심에 김현철씨가 있는 셈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미림은 소통령 현철씨의 개인 정보조직’이라는 의혹을 구체화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10년여 전으로 되돌아가 보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미림팀이 대선 직전인 92년에 한창 가동되다가 YS의 당선을 계기로 약 1년간의 휴지 상태 후 다시 재가동된 점도 김씨와 연관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시한다.
실제 김씨가 부친의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안기부 조직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 많이 노출됐다. 문민정부 출범 2년째인 94년, 당시 정가에서 확산되던 ‘소통령’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던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은 ‘통일민주당 시절(87~90년) 현철씨와 그 측근들은 ‘민주당 내 안기부’로 통했다. 14대 총선(92년) 이후 동요하는 소속 의원들의 행적을 탐문하고 각 지역구의 활동 상황, 지지도 등을 점검하는가 하면 주요 정세 및 전망에 대한 보고를 당총재인 부친에게 직보했다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특히 김씨는 87년 YS의 대선 패배 이후 정보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앙조사연구소’를 설립했고, 9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는 부친의 당선을 위해 ‘임팩트코리아’라는 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정보 동향을 모았다. 당시 김씨의 활약은 YS도 흡족해할 만큼 대선 승리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YS는 차남 김씨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인정했다고 한다.
한 전직 안기부 인사는 “90년 이후부터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른 YS에게 줄을 대는 행태가 시작되었고, 실제 내부 고급 정보들이 YS측에게 건네졌다. 또 YS정권 때에는 일부 정보가 DJ측에게 넘어갔고, DJ정권 때에는 한나라당에게 넘어가는 등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개탄했다.
그에 따르면 92년에 이미 안기부는 ‘YS 대통령 만들기’에 동원됐다는 것. 공 전 팀장의 증언대로 미림이 92년 활동하다 대선 뒤 해체된 정황과 일치한다. 14대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줄곧 군 장성 출신이 독점하던 안기부장에도 대학교수이던 김덕씨를 임명했다. 하지만 곧 ‘안기부의 정보’ 필요성이 정권 내부적으로 제기됐고, 94년 미림팀은 재구성됐다.
김현철씨가 문민정부 초기 안기부에 깊이 관여한 정황도 곳곳에서 제기됐다. 우선 문민정부 첫 안기부장을 지낸 김덕 전 부장과 권영해 전 부장이 모두 김씨에 의해 직접 추천받았거나 혹은 김씨와 가까웠다는 것. 김 전 부장은 92년 대선 초입이던 6월 김씨가 주도했던 ‘국정개혁프로그램팀’의 일원이었다. 권 부장은 김씨가 실제 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림팀이 안기부의 공식 조직이라기보다는 사조직 성격이었으리라는 정황은 또 있다. 당시 안기부 내에는 공식적인 도청팀이 존재했던 것. 전직 안기부 직원 L씨는 “당시 통신국으로 불리던 9국에서 도청 작업을 관장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3~4명으로 구성된 별도의 비밀스런 도청팀(미림팀)이 갑자기 재구성된 것이다.
당시 김현철씨의 안기부 개입에 대해서는 DJ정권 첫 국정원장이었던 이종찬 전 원장도 언급했다. 그는 98년 당시 한 인터뷰에서 “YS정권 안기부의 문제는 인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기부장을 제쳐두고 현철씨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보를 빼도록 방치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과연 미림팀의 도청 정보는 당시 안기부 내 측근인사였던 오씨와 김씨를 거쳐 권력 실세였던 김씨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 비밀스럽고 은밀한 정보를 김씨와 그 측근들은 어디에 어떻게 활용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