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저녁 6시 무렵 오랫동안 ‘사생’을 뛰어온 A 씨(여·30·프리랜서)와 B 씨(여·26·회사원)를 만났다. 그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해외에서 활동하다 오랜만에 귀국한 탓에 이들은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밤도 당연히 사생을 뛸 것”이라는 말에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사생’의 제1 조건은 바로 자동차. 얼굴이 알려진 스타들은 주로 자신의 자가용이나 소속사 밴을 타고 움직이기 때문에 이들의 공식 무대가 아닌 일상을 따라가려면 이동수단이 필수다. 기자가 만난 ‘사생’팀도 자동차가 있었는데 고가의 대형차였다. B 씨는 “A 씨 소유의 차”라며 “‘사생’도 보통 부유층 자녀나 골드미스 등 경제력이 여유로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 일이 많다”고 귀띔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스타들의 차를 뒤쫓다 보니 한 달에 기름 값만 100만 원 이상 소비된다고도 했다.
보통 3~4명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지만 이날은 기자를 만나기 꺼려하는 멤버들이 나오지 않은 탓에 A 씨와 B 씨, 두 명과 함께 ‘사생’을 시작했다.
A 씨가 운전석, 그 옆 좌석에 기자가 타고 B 씨는 카메라와 캠코더가 놓여있는 뒷좌석에 탔다. 차는 곧 아이돌 그룹 숙소 앞에 도착했다. 숙소 앞에서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A 씨가 이내 차를 움직여 숙소 주차장 출구 앞으로 차를 이동시킨다.
“보통 팬들은 숙소 앞에서 혹여 스타가 나올까 기다리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누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는 ‘사생’팬은 물론이고 웬만한 팬들도 다 알아요. 그래서 숙소 부근에서 기다리거나 주차장 인근에 이렇게 차를 세워두고 차가 나오길 기다려요. 그러면 스타가 자신의 차를 몰고 오거나 매니저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숙소에서 나오는 즉시 뒤쫓아 갈 수 있거든요.”
잠복하는 경찰이나 기자처럼 ‘사생’팀도 스타들이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날 역시 아이돌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생’팀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다. 하루에 4~5시간 기다리는 일은 기본이고 아예 모습을 보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다는 것. 그 긴 지루함은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얘기와 일상적 수다로 풀어나간다고 했다. 물론 노트북도 챙겨와 실시간으로 스타에 관한 기사 및 글들을 검색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이날은 동참한 기자에게 ‘사생’과 관련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들려줬다.
A 씨는 ‘사생’ 2년째다. 이것도 현재 좋아하는 스타들에 한해서일 뿐 그 전에는 다른 아이돌 그룹을 4~5년간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운전 실력이 늘었다고. 숙소까지 오는 동안 이리저리 추월하던 수준급 운전 실력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A 씨는 “아이돌 스타들도 자신의 사생활을 들키지 않기 위해 도망가고 매니저들도 어지간하면 ‘사생’ 뛰는 차를 알아보고 따돌리려 하기 때문에 운전이 늘 수밖에 없다”며 “질주하는 매니저를 쫓아 시속 150km 이상을 낸 적도 많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힘든 건 바로 강남 골목길이다. 강남은 일방통행길이 많아 뒤따라오는 차를 따돌리기 위한 스타나 매니저들이 돌연 방향을 틀어 역방향으로 일방통행 길에 들어선다는 것. 따라 들어갔다가는 차를 뒤쫓고 있다는 것이 확연해져 곤란하지만 이를 감수하고 따라 들어선다 해도 쫓기가 쉽지 않다. 복잡한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다가 다른 차들이 끼어들어 놓치기 일쑤기 때문.
또 이런 고생을 하고 따라붙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 다음이 문제다. 아이돌 그룹은 보통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자신이 운전하는 것보다 매니저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나가는 일이 많아 ‘사생’팀 역시 밴을 따라가는 일이 많은데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보면 스타가 없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
B 씨는 “한번은 아이돌 그룹이 숙소에 있는데 매니저가 탄 밴이 숙소로 들어갔다 나오더라. 이럴 경우 스타가 타고 있는 때가 많아 무조건 뒤따라갔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매니저가 탄 밴을 쫓아가 강남 청담동의 한 호프집 앞에 다다른 B 씨 일행은 스타의 술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내린 사람은 매니저와 일반인 여성뿐이었다. 혹여 나중에라도 스타가 올까 싶어 호프집까지 따라 들어간 B 씨 일행은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결국 스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 주변에는 다른 ‘사생’팀 팬들이 수군대면서 매니저가 앉은 자리만 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통 그렇게 뒤따라가면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생’팀들도 있어요. 그날 매니저도 알았는지 자기 친구한테 몇몇 테이블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 내가 맡고 있는 그룹 팬이다’라고 얘기하더라고요.”
매니저들 역시 자주 보이는 ‘사생’팀은 다 꿰고 있어 때로는 “오늘 여기에 안와요”라고 말해주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스타와 조우하는 일도 종종 있다. A 씨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국내활동을 하던 때 한 멤버 C와의 일화를 들려줬다. “여느 날처럼 숙소 부근에서 차를 세워놓고 있었는데 밤 늦은 시각 C가 자신의 차를 타고 숙소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곧장 그 뒤를 따라갔죠. 15분 정도 도로를 달리던 C는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A 씨의 차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을 알아본 모양인지 100km 이상의 속도로 내달렸어요. 물론 우린 행여 놓칠세라 바짝 따라붙었죠.”
그런데 30분 정도가 지나 한 사거리에서 신호가 걸리자 C가 차에서 내려섰다고 한다. A 씨는 “C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며 상당히 긴장했다”며 “평소 C의 거침없고 직선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데다 다른 ‘사생’팀이 C를 쫓다가 된통 혼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A의 예상은 빗나갔다.
“차에서 내려 우리 일행에게 다가온 C는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오랜만에 오셔서 함께 음식점에 가는 길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뒤따라오는 건 위험해 다칠 수 있으니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당연히 꾸중을 들을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는 연신 죄송합니다는 말만 연발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그 사이 신호가 바뀌자 C는 우리에게 다칠 수 있으니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곤 다시 차를 출발시켰어요. 당연히 우린 약속대로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죠.”
그 당시를 회고하던 A 씨는 “이게 바로 ‘사생’의 묘미다”고 말했다. 공개방송이나 콘서트야 자리도 멀고 TV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데다 숙소 앞에서도 스타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사생’을 뛰다 보면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대화도 나눌 수 있기 때문.
A 씨는 “스타와 직접 얼굴을 대면한다는 감동과 흥분을 잊기는 쉽지 않다”며 “스타가 우리의 얼굴을 기억하고 알아봐주는 일도 있어 뭔가 특별한 팬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스타와의 만남 외에 ‘사생’을 뛰는 이유는 또 있다. 공식적 팬클럽 모임이 아닌 팬클럽 내 소모임이 열릴 때 상영회를 하기도 하는데 이때 TV나 인터넷에 나왔던 모습이 아닌 자신만 가지고 있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B 씨는 “스타의 일상이 담긴 장면을 나만 소장하기 위해 ‘사생’을 뛰기도 하지만 팬들과 ‘희귀영상’을 공유하고 싶어서 쫓기도 한다”며 “소속사 제공 동영상이나 TV 출연분 짜깁기보다는 스타가 친구들과 놀거나 편하게 술을 마시는 등 일상의 모습이 팬들로서는 정말 보기 힘든 장면이라 가치가 높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일 때문에 간혹 소속사 측에서 미리 모임을 알고 찾아와 준비한 동영상이 있으면 봐도 되겠냐며 요청하기도 한다고. 혹시라도 공개되어서는 안 될 장면이 있을까봐서란다.
또한 ‘사생’팀 및 극소수 팬들만 공유하는 것도 있는데 바로 스타들의 전화번호란다.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전화번호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던 A 씨는 “연예인들이 한 달 주기로 번호를 바꾸지만 극소수 핵심 팬들은 바로 번호를 알 수 있다”며 “팬들이 많다보니 그 중에 이동통신사에 근무하는 팬도 있는데 그들이 스타가 번호를 바꾸면 그 즉시 연결된 소수인원에게만 번호를 알려주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스타의 번호로 대포폰을 만드는 이도 있다고.
한참 얘기를 듣다 보니 40분 전쯤 숙소로 들어갔던 밴이 나왔다. 바짝 긴장한 A 씨는 베테랑답게 바로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밴이 좌회전을 해 꽁무니만 보일 때쯤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10분쯤 달렸을까. A 씨가 “아, 이 길이면… 아닌데. 그래도 모르니 따라가 보자”고 말한다. 이유를 물으니 이 길은 매니저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워낙 ‘사생’을 하며 헛걸음한 일이 많다보니 매니저 집으로 가는 길도 익히 알고 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숙소에서 20여 분 떨어진 곳에서 밴이 멈췄고, 매니저만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A 씨의 말처럼 매니저는 퇴근하는 길이었다.
헤어지기 전, 아직도 C와의 만남의 여운을 잊지 못하고 있는 A 씨와 B 씨에게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다. 둘 모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날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러자 A 씨와 B 씨 모두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 뭐가 힘들겠냐”며 “내일도 나올까. 몇 시에 만나지” 등을 약속하고 있었다.
문다영 객원기자 dy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