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실의 마지막 작품이 된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 ||
화려했던 그의 인생 뒤편에는 말 못할 아픔도 많았다. 어렸을 때는 가난함 때문에, 데뷔 이후에는 자신을 데뷔시켜준 매니저가 살해당하는 아픔을, 결혼 후에는 이혼의 쓰라림도 맛봐야했다. 쓰러질 때마다 오뚝이같이 일어섰던 최진실은 결국 자신에 대한 악성 루머로 고통을 당하다 자살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강해보였던 그이기에 국민들의 충격도 그만큼 컸다. 1988년 연예계 데뷔 이후 수많은 ‘희로애락’을 겪으며 20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고 최진실의 인생역정을 되돌아봤다.
1968년생인 최진실은 서울 동명여중과 선일여고를 졸업한 뒤 1988년 곧바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연예계 데뷔 관행으로 비춰봤을 때 스무 살이란 나이는 상당히 이른 나이였지만 그가 겁 없이(?) 연예계에 뛰어든 건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
최진실은 편모 슬하에서 자라왔고 이 때문에 겪게 된 가난 때문에 자신이 돈을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그만큼 어머니와 동생 최진영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데뷔 초 최진실의 별명은 ‘최 수제비’. 어려웠던 어린 시절 홀어머니, 남동생 진영 씨와 수제비를 물리도록 먹은 탓에 수제비를 맛있게 끓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연예계 관계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부르는 사람들이야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최진실 본인에게는 ‘성공’에 대한 목표를 다잡을 수 있게 했던 말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음에도 브라운관에서 보여주는 생기발랄한 모습 덕분이었다. 덕분에 최진실은 ‘서민 스타’라는 이미지도 강했다. 이후 최진실은 귀여운 외모와 더불어 옆집 여동생이나 누나 같은 친근한 인상을 주었고 꿋꿋하게 자기 앞길을 헤쳐 나가는 ‘똑순이’ 이미지도 얻었다.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한중록>으로 연기 인생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삼성전자의 TV 광고에 출연하며 톱스타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최진실의 깜찍하고 여성스러운 대사는 전국민의 유행어였다. 최진실은 이 CF를 발판으로 해 이후 출연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대부분 히트시키며 ‘국민요정’이 됐다. 지금이야 ‘국민배우’ ‘국민가수’ 등 ‘국민’이라는 칭호가 흔하게 사용되지만 당시는 최진실 이외에는 누구도 이 같은 찬사를 받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90년 이명세 감독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출연,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수줍은 새댁 연기를 완벽히 소화하며 영화배우로도 인정받기 시작했고, 같은 해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서는 생기발랄한 여대생 역을 소화하며 연기자로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91년 출연한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에서는 어린 나이에 해외로 입양된 비운의 여인 역할을 맡아 어린 시절의 불운했던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듯 열연했다.
▲ 출연작 속 다양했던 최진실의 모습. 왼쪽 위부터 드라마 <장밋빛 인생>, 영화 <편지>,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별은 내 가슴에>, 영화 <마누라 죽이기>, 드라마 <질투>,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
최진실에게 처음 시련이 시작된 것은 1994년 매니저였던 배병수 씨가 살해되는 사건에 휘말리면서부터다. 배 씨는 최진실의 운전사였던 전 아무개 씨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고 최진실은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하기도 했다. 특히 배 씨는 최진실이 데뷔 때부터 함께 해왔던 사람으로 최진실은 이 사건 때문에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진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영화 <마누라 죽이기>(1994년)를 시작으로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1996년), <그대 그리고 나>(1997년) 등 출연작마다 성공을 거둬 자신의 인기가 여전함을 세상에 보여줬다.
특히 1997년 개봉된 영화 <편지>는 시한부 인생에 걸려 죽어가는 남편(박신양 분)을 지켜봐야 하는 비운의 아내 역할을 맡아 전 국민을 울음바다에 빠뜨리기도 했다.
상복도 많았다. 최진실은 1991년 대종상, 춘사영화제,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휩쓸었고 1995년 대종상 여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인기상, 1997년 MBC 연기대상 대상, 1998년 한국방송대상 여자탤런트상 등을 수상했다. 이처럼 받은 상만 나열해도 그가 얼마나 90년대 안방과 스크린을 주름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배우로서 정상에 있던 최진실은 2000년 연하의 야구선수 조성민과 결혼하며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당시 조 씨와의 결혼은 연예계 최고 여배우와 미남 스포츠 스타의 만남이란 점에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당시 조 씨는 일본 최고 인기 구단으로 현재 이승엽 선수가 뛰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결혼 2년 만인 2002년 별거, 2004년 9월 협의 이혼해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두 사람은 당시 이혼 결정을 두고 공방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조성민이 최진실을 폭행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조 씨와의 이혼은 최진실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줬다. 보수적 한국사회에서 여배우의 이혼은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최진실은 이혼으로 인한 루머와 가십에 시달렸고 그를 광고 모델로 삼았던 건설회사는 회사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입혔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 지난해 4월 제43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최진실. | ||
올해 3월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선 당대 톱스타와 매니저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는 아줌마 홍선희 역을 맡아 ‘줌마렐라’(아줌마와 신데렐라의 합성어) 신드롬을 일으켰다.
최진실은 연기뿐 아니라 자신이 키우는 두 아이에 대한 강한 애정도 나타내며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올해 5월에는 두 아이들의 성을 조 씨에서 최 씨로 바꾸는 등 당당한 여성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최진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지난달 일어난 안재환의 죽음이 발단이었다. 특히 절친했던 동료 연예인 정선희의 남편이면서 자신과도 막역한 사이였던 안 씨의 죽음에 최진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설상가상 안 씨의 죽음과 관련한 악성루머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설명이다.
인터넷상에 안재환의 사채와 관련해 최진실이 사채업에 손을 대고 있고 안재환에게 25억 원의 돈을 빌려줬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최진실이 직접 경찰에 수사를 의뢰해 최근 용의자가 체포됐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가난과 이혼이라는 큰 아픔을 꿋꿋이 이겨내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서며 오뚝이처럼 살아온 최진실이 안타깝게도 루머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