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중앙언론사 논설·해설 위원 24명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요즘 자신이 탐독하고 있는 책을 소개한 대목이다.
노 대통령이 오찬 간담회가 있던 그날 아침에도 읽었던 바로 그 책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난 1995년 저술한 (새물결·2000년 번역). 도대체 이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이른바 ‘연정 정국’ 한가운데서 가진 언론인들과의 간담회에서까지 언급했던 것일까.
모두 13개 논문이 묶인 이 책에는 1989년 동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기점으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우파 대 좌파’, ‘노동 대 자본’의 대결 구도가 의미를 잃었다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적’을 무찌르기 위한 규율과 통제, 대결의 질서가 최우선의 가치로 우상시되던 현실도 변화했다는 것.
노 대통령은 이 책을 소개하며 “기존 우리의 합리주의 사고의 틀로써 다 해석할 수 없는 이런 변화가 지금 이미 진행됐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권, 언론, 우리 사회의 지배 구조에 대한 기존의 인식으로는 오늘의 문제, 또는 미래의 문제를 부닥쳐 나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겠다는 점을 시사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불안감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대결구도를 근저로 하는 기존의 사고 틀로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노 대통령이 제시한 ‘대연정’ 구상의 철학적 토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정치판에 뿌리내린 적대 구도가 사회·문화 등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쳐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립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데 대해 문제 의식을 지닌 것 같다. 결국 적대적 대립구도의 뿌리 격인 현재의 정치 구도를 바꾸지 않으면 다른 분야의 갈등은 물론 미래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이유로 ‘대연정’을 제안한 것이며, 이는 곧 정치판을 새롭게 짜보겠다는 강한 의도로 읽혀진다.
이 책을 번역한 정일준 아주대 국제학부 교수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대통령이 책을 읽고 있다는 소식에 상당히 놀랐다”고 말했다. “내가 이 책을 번역했어도 1백% 이해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게 정 교수의 설명. 이렇게 난해한 책을 노 대통령은 여러 번 탐독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이 책에는 기존의 정치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아웃라인이 제시돼 있다”며 “대통령은 기존의 냉전체제로는 우리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정치 질서를 바꾸기 위한 일환으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민주당이나 민노당 등에 ‘소연정’을 제안했던 것으로 정 교수는 보고 있다.
청와대는 지난 3월 이 책의 출판사에서 10여 권을 구입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뿐만 아니라 청와대 참모들도 이 책을 읽었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노 대통령에 대해 “참 진지한 양반”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분”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대통령 임기 중간 시점인) 지금도 (국정 전반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