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 | ||
#장면1 문희상 의장 간담회장
“태풍 올 땐 엎드리지만…”
지난 9월22일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의 댜오위타이(釣魚臺) 기자간담회장. 이날 간담회 내용은 여권이 겪고 있는 위기상황과 이에 따른 자괴감, 그 연장에서 향후 정국의 운용 방향을 엿보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 의장은 “여권이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고, 이건 ‘쓰나미’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문 의장은 “우리가 뜨거운 여름철 무더위에 휴가를 반납하고 민생에 전념했는데도 여당 지지도나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계속 내려가서 뭐라 얘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건 쓰나미라서 깜짝쇼로는 이겨낼 수가 없고, 왕도도 없으며 도깨비 방망이로도 안된다”고 진단했다.
문 의장의 처방은 이렇다.
“태풍이 올 때는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최선이고, 까불다가는 쓰나미에 다 휩쓸려간다. 지금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국민이 믿지 않는 상황이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먹히지 않는다. 오직 진정성으로 대하면서 깊은 반성을 통해 신뢰 회복으로 나가야 한다.”
문 의장의 이 같은 발언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청와대회담에서 일축해 버린 노 대통령의 대연정론 제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문 의장은 그러나 “연정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생각이 변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문 의장의 정국 전망은 ‘지금은 불가항력적인 쓰나미 국면이므로 노 대통령이 당분간은 정치적 사안을 제기하지 않겠지만 연말 이후 연정론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문 의장에 따르면 “대화와 타협은 포기할 수 없는 참여정부의 국정원리이기 때문에 노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연정)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사안을 제기하지 않는 이 휴지기에 노 대통령은 무엇을 생각하고 궁리할 것인가.
#장면2 노 대통령 귀국 비행기 안
“여대 국회일 때 일 되더라”
지난 9월16일(한국시간) 방미 일정을 마치고 뉴욕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기 내 기자간담회. 핵심은 “우리나라의 정치구조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노 대통령의 ‘워딩’이다.
“고민 하나 말씀 드린다. …일본이 제도 변화 과정서 보여주는 지체(遲滯), 우정사업 그거 하나 개혁하는 데 목표 연도가 2017년인가요. 한국에서 2017년을 목표로 내세우면 그거 안하자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2020년까지 국방개혁을 하겠다고 하니 사람들이 전부 하품한다. …영국의 예를 들면 전후 노동당 내각이 너무 오래 끌고 왔다 싶으니까 정권 교체를 통해 대처 시대로 오면서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그게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있을 때 노동당이 다시 돌아와 10년, 15년 주기로 권력이 바뀌었다. …네덜란드나 아일랜드처럼 사회적 합의가 통치의 기본인 나라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은 앞으로 어디에 속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굉장히 고심된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정치 상황에 관한 모델들을 한번 분석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별로 착안하지 않았던 것인데… 10년 20년이 지나더라도 확실하게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권력을 가진 나라들과, 이런 것보다는 견제에 중심을 두고 정치적 상황이 오래 계속되는 나라들을 비교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에 관해 비교분석해 보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상황 인식은 이렇게 요약된다.
‘지난 4·30 재·보선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정치구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재·보선에서 완패한 뒤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국회와 대통령의 갈등과 대립 상태가 풀어가기 좋은지, 총리와 대통령의 대립 상태가 풀어가기 좋은지가 일단 고민의 주요한 축이다. 앞의 것에 방점을 두면 대통령제, 뒤에 방점을 두면 내각제다. 프랑스 동거정부처럼 둘 사이의 절충점을 찾으면 이원집정제의 형태가 될 것이다.’
결국 여소야대 현상이 노 대통령의 고민을 키우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여소야대라 하더라도 우리의 의사결정 구조가 미국처럼 성숙한 수준의 민주주의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어떤 형식으로든 대통령제에 대한 손보기는 불가피하다는 생각도 읽힌다.
노 대통령은 평소 “우리 정치사에서 정계개편을 통해 국회 구조를 바꾼다거나 중요한 정책을 채택하는 경우는 모두 여대 국회일 때 행해졌다”고 말해 왔다. 여야가 맞싸우면서 정책결정과 제도개혁을 지체시키는 우리 정치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여기서 싹튼 것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이 당시 기내 기자간담회에서 내린 잠정 결론은 이렇다.
“지금 나는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들, 또는 정치구조 전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는데 우리나라가 그것을 풀어나갈 새로운 시스템을 갖고 있느냐, 이런 것이 우리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부분을 고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번 정기국회 시즌에 이런 문제, 즉 한국의 정치구조와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정교하게 정리한 뒤 내년 초쯤 다시 ‘대연정론과 맞먹는’ 구체적 제안을 내놓을 것이란 예측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