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애마부인>이 단순한 흥행을 넘어 신드롬의 경지에 올랐을 때 속편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문제는 “누가 애마 부인이 될 것인가”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안소영을 다시 출연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인엽 감독은 새로운 선택을 한다. 바로 오수비였다.
1960년생으로 1981년 미스코리아 서울 대표였던 그녀에게 <애마부인 2>(1984)는 첫 영화였다. 이미 화제가 된 전작 때문에 큰 부담감이 있었고 아직 연기력도 어설펐지만 ‘오수비의 애마’는 사뭇 달랐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그녀는 좀 더 솔직하고 당찬 캐릭터로 태어났다. 전편의 애마가 외로운 밤에 허벅지를 찌르는 유한 마담이라면 2편의 애마는 이혼 후 홀로 선 커리어 우먼으로, 여행사에서 외국인들을 상대한다.
전 남편 현우(최윤석 분)는 제주도에서 목장을 운영하고 있고, 현우의 후배인 동엽(하재영 분)은 미국 유학파로 나비 채집가다. 우연히 만난 상현(신일룡 분)은 남성적 매력이 넘친다. 현우가 재결합을 요구하고 동엽과 상현이 각각 감성과 육체를 내세우며 접근하는 상황. 세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긴 하지만 애마는 그 어떤 남자도 선택하지 않는다. 이것은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가부장적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그녀는 주체적 사랑이 결여된 섹스의 공허함을 알고 있으며 동성애적 관계나 마스터베이션을 대안으로 선택한다.
독립적 여성의 이미지는 역시 정인엽 감독이 연출한 <유혹 시대>(1986)에도 이어진다. 여고 동창인 하림(김진아 분)과 학희(이혜숙 분)와 지현(오수비 분). 하림은 광고회사 실장이고 학희는 대학원생이며 지현은 항공사 직원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세 여자의 진솔한 욕망과 남성과의 관계를 드러내는데 이들 중 가장 급진적(?)인 여성은 바로 지현. 그녀는 한 남자를 놓고 하림과 게임을 벌이는데 그들의 삼각관계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남자이고 하림과 지현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린다.
한편 오수비는 욕망과 복수의 화신이기도 했다. 밀려오는 파도에 마스터베이션을 하던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1995)는 에로 올드 팬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걸작.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1979)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에서 수진(오수비)은 무심한 남편에겐 이별을, 정신병적인 스토커에겐 처절한 피의 응징을 가한다. <애마부인 2>의 아류였던 <깊은 숲속 옹달샘>(1985)에서도 그녀의 원초적 욕망은 유감없이 드러나는데 목장 주인이 양녀처럼 키우는 스무 살 농아 가야 역의 오수비는 한참 성에 눈 떠가는 여성의 야성적 본능을 보여준다. 이것은 <훔친 사과가 맛있다>(1985)에도 이어지는데 그녀는 거친 남자를 만나면서 뜨거운 욕정의 여인으로 변한다.
<부나비는 황혼에 슬프다>(1985)는 그녀의 연기 변신이 돋보였던 작품. 슬립 가운 대신 바닷가 여성의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오수비는 “남자와 술은 얼마든지 있고 난 내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라며 억척스럽지만 마음 한켠엔 상처와 순정을 품은 여인이 된다. 한편 <여자, 여자>(1985)는 ‘애마 선배’ 안소영과의 공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인데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1986년 <유혹 시대>를 끝으로 영화계를 떠났던 그녀는 1996년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하지만 여전한 몸매와 미모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로 컴백한다. 하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용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가끔씩 아침 프로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녀는 단 3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내놓았던 단명했던 배우였다.
글래머러스하면서도 눈빛엔 뭔가 결연한 기운이 서려 있던 인상적 모습의 오수비. 그녀는 가장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여배우 중 한 명이었으며, 영화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주장을 화끈하게 펼쳤던 여성이었다. 지금의 40~50대 남성 관객들이 아직도 그녀를 기억하는 건 그녀의 육체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강인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