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범(왼쪽)과 서정원 | ||
대학 시절 빡빡한 훈련 스케줄조차 소화하기 힘든 와중에 학생으로서의 의무까지 떠안아야 했던 체육 특기자들. 이들의 힘겨웠던 ‘이중생활’ 뒷얘기를 들어보자. 수업도 수업이지만, 대회 차출로 자주 학교를 비우는 대형 선수들에게 시험은 ‘쥐약’보다 끔찍하다.
특히 경영학과를 나온 야구의 이종범(32•기아)과 축구의 서정원(32•수원)이나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한 농구의 전희철(29•KCC•고려대 졸)과 같이 전공이 체육과 무관한 선수들은 남다른 ‘이중고’에 시달린다.
물론 이러한 주력 선수들은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이 체육 특기자라 해서 특혜를 베푸는 경우는 적기 때문에 ‘알아서 봐주겠지’ 하고 마음을 놓았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실제로 결시로 인해 유급이나 학사 경고를 받은 선수들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특히 결시율이 높은 축구나 야구 선수들은 학기 초마다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눈도장’을 찍느라 발바닥에 땀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하더라도 시험까지 면제받지는 못했던 이들은 시험에 임하는 태도에서도 일반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그냥 학과와 이름만 쓰고 바로 나왔다”는 이종범이나 서정원처럼 ‘출석에 의의를 두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지만 농구의 김주성(23•중앙대 사회체육 졸)과 같이 ‘교수님 죄송합니다. 훈련 때문에 공부를 못했습니다’라고 쓰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교수님이 혹시라도 특기자인 것을 몰라서 학점을 ‘펑크’ 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선수들은 답안지에 별도의 표시를 한다고 한다. “이름 옆에 항상 ‘야구부’라고 커다랗게 썼다”는 이병훈 SBS 해설위원(33)은 “바로 일어나기가 머쓱해서 항상 영어책 같은 걸 갖고 가서 봤다”고 한다.
▲ 김주성 | ||
이들과 달리 최근 선배 황선홍(34•전남)과 함께 모교 대학원에 진학한 월드컵 스타 유상철(31•울산)은 ‘범생이 특기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숙소에서 선수들에게 한자를 가르친 정종덕 당시 감독 때문에 축구 선수들 중에 중문과를 택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유상철의 전공 선택 동기를 간접적으로 밝히는 건국대 임동석 교수는 “체육 특기자들 중에서 출석률이 꽤 높았고, 시험 답안지도 다른 선수들과 달리 백지로 내지 않고 전공과 관련된 내용을 쓰려고 노력했다”며 그의 성실성을 높이 샀다. 이에 대해 유상철은 “학기가 시작하면 으레 교수님들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다”며 ‘사전포섭 활동’도 위력이 있었음을 실토했다.
다른 학교와 달리 특기자 대우를 받지 못했던 서울대 출신들은 이러한 ‘사전 포석’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토플 때문에 번번이 유학이 좌절됐다는 축구선수 출신 김종환 교수(중앙대 체육학)는 이러한 엄격함 때문에 운동부 학생들은 시험 때면 동료들에게 밥을 사 먹이며 노트를 빌리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중생활’의 고통은 지도자나 대학원생 신분일 때도 마찬가지다. 프로팀 울산의 2군 감독과 울산대 감독을 겸임하는 바쁜 와중에 하루 동안 울산과 서울을 오르내렸던 박사 출신 최만희 부산아이콘스 코치(46)는 “성적을 책임져야 하는 감독으로서 드러내놓고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며 남모를 고민 털어놓았다.
올 초 한국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볼링스타 이지연(34•서울대 강사)도 지난해 논문 제출 기간이 전국체전과 겹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졸업이 미뤄질 뻔했다. 숙고 끝에 전국체전에 참가한 선수들을 논문의 ‘연구 대상’으로 활용하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옷을 벗은 상태에서 신체를 측정해야 하는 수치스러움 때문에 여자 선수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가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논문 제목이 ‘여자 볼러들의 형태학적 특성’이었다고).
한편 “영어 때문에 박사과정 입학시험에 거푸 네 차례나 미끄러졌다”는 최 코치의 말처럼 선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과목은 역시 영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서정원처럼 운전중에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거나 강초현(20•갤러리아사격단)처럼 잠자리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는 선수들이 늘고 있다. 한재성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