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제품 복수상표 자율판매 제도가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정유사와 주유소의 힘겨루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산업자원통상부가 혼합판매 제도를 내놓으면서 기대한 효과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4대 정유사(SK에너지,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가 과점하고 있는 국내 석유시장의 경쟁 촉진이다. 또 이를 통해 자연스레 석유제품의 최종 소비자가격 인하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석유협회의 2013년 12월 말 통계에 따르면 전국 1만 2857개 주유소 중 겨우 67곳만이 혼합판매를 하고 있다. 왜 이렇게 혼합판매가 활성화되지 못 하고 있을까. 주유업계 관계자는 “제도의 취지 자체는 좋지만 (정부가) 업계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4대 정유사 중 한 곳의 폴을 달고 자영주유소를 운영하는 한 사장은 “혼합판매를 하려면 정유사와 물량공급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정유사가 갖가지 수법을 동원해 결국 전량공급계약을 유지하도록 만든다”고 토로했다. 지난 10월 한국주유소협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김문식 주유소협회 회장도 “2012년 73개 주유소의 신청을 받아 혼합판매계약 전환을 지원했지만 정유사의 회유와 압박으로 대부분의 주유소들이 신청을 취소하고 2곳만이 물량계약으로 전환했다”고 밝힌 바 있다.
혼합판매 정책에 대한 정유업계의 반발도 만만찮다.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석유협회는 정면으로 반기를 든 모양새다. 이들은 각 정유사가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구축한 브랜드 가치를 본질적으로 훼손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또 특정 브랜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뺏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혼합판매 유류를 사용한 소비자에게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소재를 따지기가 불분명해져 결국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된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상표권과 소비자 선택권 침해도 문제지만 가장 우려가 되는 건 판매 후 문제 발생 시에 책임소재를 가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라며 “정유사에서 회사 이름을 걸고 판매하는 것은 단순히 기름이 아니라 자사 제품에 대한 책임까지 지겠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다른 정유사 관계자도 “정유사들 기름이 다 똑같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기본적으로 모든 회사가 정해진 규격 범위 안에서 원유를 정제하겠지만 회사마다 첨가제가 다르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실제로 각 정유사 석유제품에 차이가 있을까. 지난해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정수성 의원실에서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4대 정유사들이 판매하는 석유제품이 품질과 성능 면에서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의 자영주유소 사장은 “저유소에 한번 가보라”며 “예컨대 GS칼텍스가 운영하는 저유소에서 SK든 현대든 다른 정유사 탱크로리가 GS 기름을 받아 자기네 폴 주유소에 공급한다”고 말했다.
정유사는 물류비를 절약하기 위해 주로 해안지역에 있는 정제공장에서부터 송유관 등을 통해 석유제품을 대량으로 운반해 저유소에 저장한다. 저유소는 각 정유사에서 운영하는 곳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이 있다. 한데 특정 브랜드 정유사 저유소에서 다른 브랜드 탱크로리들이 제품을 공급받아 자사 주유소에 납품한다는 말이다.
앞서의 주유업계 관계자는 “저유소에서 물량교환을 하는 행태는 정유사들 스스로 혼합판매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하지만 정유업계 관계자는 “저유소에 이뤄지는 물량교환은 물류비용 절감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해왔던 합법적인 일”이라고 반박했다.
제휴카드 문제 해결을 위해 이미 2010년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방안을 검토했었다. 당시 공정위가 발표한 ‘민생품목에 대한 불공정행위 감시강화 방안’에 따르면 ‘어느 주유소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제휴카드 보급을 유도할 예정’이라고 나와 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다는 뜻이다. 현재 복수의 브랜드 주유소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카드는 있지만, 특정 브랜드의 포인트 적립보다 혜택이 크지는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유업계와 주유업계는 서로의 모순만 지적하며 맞서고 있다. 혼합판매를 둘러싼 업계의 분쟁에 대해, 2대째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한 사장은 “가장 좋은 방법은 전국 모든 주유소가 궁극적으로 상표를 떼야 한다”며 “주유소는 소매 기능을, 정유사는 원유 정제와 유통 기능만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재훈 기자 julia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