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자리라서 그런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오후의 여유로운 햇살 아래서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매직’이나 다름없었다. 스물두 살의 아가씨한테 ‘초롱이’라는 앳된 별명이 어울리진 않았지만 특유의 발랄함이 그녀를 더욱 빛나게 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함께 ‘사격 요정’ ‘사격계의 신데렐라’로 우리 곁에 다가왔던 강초현(22·갤러리아 사격팀·고려대 2년).
너무 높이 날았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지상에 불시착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가 최근 다시 과녁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태릉선수촌 부근의 한 갈비집에서 만난 강초현은 결코 슬럼프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백만불짜리’ 미소로 기자를 맞았다.
“얼마 전 현호 오빠(핸드볼 최현호)와 취중토크 하셨죠? 오빠한테 얘기 들었어요. 그때 저도 그런 인터뷰해보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정말 현실로 이뤄졌네요.”
강초현은 ‘취중토크’라는 이색적인 인터뷰 자리가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야외에 잘 차려진 음식을 앞에 놓고 고기를 구워가며 곁들이는 소주 한 잔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연신 웃음을 흘리며 수다를 떨었다.
강초현은 지난 4월 봉황기사격대회 우승으로 ‘재기의 총성’을 울리는 듯했다. 그러나 5월 중순 창원에서 벌어진 회장기사격대회와 월드컵 선발전에선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강초현의 최근 화두는 ‘어떻게 하면 총을 잘 쏠까’라고 한다.
“정말 궁금해요. 어쩜 그렇게 총을 잘 쏠 수 있는지. 창원에서 저랑 같이 방을 썼던 친구가 요즘 한창 잘나가는 서선화예요.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아 친했는데 다른 얘긴 다 오픈해도 총 잘 쏘는 비결은 안 가르쳐 주더라고요. 같이 잠자고 똑같이 밥 먹고 훈련했는데 그 친구가 나보다 총을 잘 쏘는 이유가 뭔지 정말 궁금해요.”
강초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국제대회 승리보다 대표팀에 발탁되기가 훨씬 더 어려운 현실에서 동료, 선후배들과의 경쟁은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듯한 긴장감을 유발시키게 마련이다.
강초현한테 시드니올림픽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하자마자 순식간에 ‘강초현 신드롬’을 일으키며 엄청난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앳된 외모와 환한 미소, 당찬 인터뷰 태도, 그리고 아버지가 안 계시는 어려운 가정환경이 공개되면서 인기 연예인을 능가하는 신데렐라로 자리매김했었다.
“언제 그런 적이 있었나 싶어요. 그런데 유명세가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제가 하지 않은 말들이 인터뷰한 것처럼 기사화되는 바람에 동료들의 오해를 샀던 적이 많았어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올림픽 이후 사람들은 저한테 ‘사람’이 아닌 ‘기계’를 원하는 것 같더라고요. 만점이 아니면 우승하기 힘든 상황에서 2위, 3위는 우습게 생각하는 거예요. 시합 때마다 우승하면 그게 사람인가요? 기계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한 사격은 고등학교 입학 후 한 차례 고비를 맞았다. 스파르타식 훈련 탓에 총을 잡기가 싫었던 것. 계속했다가는 사격 외의 다른 인생은 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사격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했던 게 너무 아깝더라고요. 다시 공부를 시작하자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고. 솔직히 대학가는 수단으로 삼았던 건지도 모르죠. 죽자 살자 사격에만 매달리진 않았어요.
지금도 사격을 운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취미 이상 정도? 그래야만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끔 며칠 쉬다가 오랜만에 총을 들고 사격복을 입으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해질 때가 있어요. 그게 아마도 사격을 버릴 수 없게 하는 매력 아닌가 싶어요.”
잘 마시면 소주 1병, 평범하게 하면 소주 반 병이 주량이라는 강초현은 대학 입학 후 신고식처럼 치르는 ‘사발식’을 경험해보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다는 반응이다.
“사랑이요?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올림픽 끝나고 잠시 교제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재미있게 만났고 좋은 감정을 공유했다고 생각했는데 서로 원하는 게 많아서 그런지 결국 헤어지고 말았어요. 친구들은 남자친구를 사귀며 ‘바람’도 피고 ‘양다리’도 걸치는데 난 한 사람한테만 푹 빠지는 스타일이거든요.”
강초현은 “구애 받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사귀고 싶다’며 전화를 걸어온 남자들은 있었지만 직접 만나서 프러포즈를 받은 적이 없어 여간 아쉬운 게 아닌 모양이다. 가끔 그 흔한(?) 선수촌에서의 러브스토리를 꿈꾸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대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떤 선수들은 제가 체조 선수인 줄 알아요. 얼굴이 작고 항상 머리를 묶고 다녀서 그런 것 같아요. 그들이 제 몸매를 몰라서 그래요. 놀라운 뱃살을 보면…. 전체적으로 통통하고 육감적이죠.”(말을 해놓고 한참을 웃는다)
문득 어느 신문에서 봤던 사진이 떠올라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진을 보니까 굉장히 글래머러스해 보이던데?”
“아주 예리하시네요. 그거 ‘뽕’ 아니에요(이 말을 하는 강초현의 당당한 표정에 기자는 ‘자지러지는’ 줄 알았다). 가끔 대중 목욕탕에 가면 민망할 때도 있어요.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남편한테 사랑받을 거라고. 그 말에 위안받았다니까요.”
‘코도 좀 세우고 쌍꺼풀 진 눈을 만들어 이목구비가 더 또렷한 얼굴이 되면 바랄 게 없을 것 같다’고 작은 소망을 털어놓는 ‘초롱이’ 강초현과의 취중토크는 술보다 취재원의 너무나 솔직한 이야기에 흠뻑 취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