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엘류 감독 | ||
기름에 불을 지핀 건 동아시아컵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쿠엘류 감독이 공항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주문을 따라주지 못했고 감독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부진의 원인을 선수들 탓으로 돌린 대목이다.
선수들은 과연 쿠엘류의 이런 ‘지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번 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선수들로부터 솔직한 속내를 들어봤다.
각자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선수들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일명 ‘오만전 쇼크’로 불리는 베트남, 오만전 패배 이후 선수들이 지적한 문제점들이 동아시아컵 이후에도 비슷하게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수들은 감독이 선수 탓을 한 부분에 대해 일부 ‘시인’을 했고, 또 최근 불거지고 있는 월드컵 멤버와 비월드컵 멤버 사이의 갈등설에 대해서도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동아시아컵대회에서 주장을 맡았던 유상철(32·요코하마)은 소속팀으로 복귀해 일왕배 출전을 앞두고 있지만 대표팀 생각만 하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일본전을 무승부로 끝낸 다음에는 잠이 오질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꼬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장에선 그 문제점을 감독님한테서 찾기는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선수들이다. 지금과 같은 후배들의 정신 자세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떤 유능한 감독이 와도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유상철은 쿠엘류 감독이 일부 선수들의 정신력을 거론한 것에 대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수긍했다. 유상철은 “선수들의 생활까지 터치했던 히딩크 감독에 비해 쿠엘류 감독은 선수들에게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다”면서 “A매치를 여러 번 치른 상태라 이제는 감독님도 윤곽을 잡지 않겠느냐”며 쿠엘류 감독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수비라인의 핵심인 노장 김태영(33·전남)은 체력과 조직력의 강화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월드컵 때와 비교해서 지금의 대표팀은 체력적으로 많이 떨어지고, 새로 들어온 선수들이 많아서인지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 부분은 선수들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대표팀을 조금 일찍 소집해서라도 체력과 조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김태영은 덧붙여서 “감독님은 배의 선장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현재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해도 선수 입장에선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다”며 쿠엘류 감독의 강력한 리더십을 기대했다.
최진철(32·전북)도 “새로 뽑혀 들어온 선수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쿠엘류 감독님이 선수들의 정신력 부재를 지적했다면 우리도 할 말이 없다”는 대답으로 말을 아꼈다.
중국전에서의 퇴장으로 정작 한·일전에서는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이을용(27·안양)은 자신의 ‘실수’가 더 뼈아픈 듯했다.
“일본전을 보면서 정말 착잡했다. 어느 선수가 이기고 싶지 않았겠나. 하지만 연습시간도 많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호흡이 맞지 않았다. 감독님도, 선수들도 목표는 하나다. 그렇다면 좀 더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
고참 선수들은 ‘쿠엘류호’가 내년 월드컵 지역예선을 포함해 잇따른 국제경기에서 이전과는 달리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대표팀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관우(25·대전)는 “개인적으로는 3년6개월 만에 대표팀에 발탁됐기 때문에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며 “오만전 이후 언론에서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분위기는 좋았고 선수들도 열심히 했지만 훈련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월드컵 멤버와 비월드컵 멤버 간의 불화, 신·구세대간의 단절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 “처음 들어온 선수들이 선배들을 어려워하는 것은 있지만, 마찰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월드컵 4강을 이뤘기 때문에 대표팀에 들어온 젊은 선수들이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라는 게 이관우의 설명이다.
한편 이번 대표팀에 참가했던 A선수는 보이지 않는 상처를 받고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소속팀에서 최고의 주가를 날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체 멤버로도 뛰지 못했던 것. A는 후배들한테까지 밀리는 신세가 되자 “이렇게 벤치에 앉혀 놓으려면 뭐하러 뽑았냐”며 쿠엘류 감독의 용병술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나이 어린 선수도, 신인도 아니고 이 나이 먹어서까지 테스트를 받아야 하느냐. 아직도 내 실력이 의심스럽거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나 말고도 벤치에 앉혀둘 후배들은 많다.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A는 쿠엘류 감독의 선수 기용과 관련해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는 대표팀에서 발탁돼도 태극마크를 사양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순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