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재기불능으로 여겼던 김재현이 고관절 수술 성공으로 제2의 야구인생을 살고 있다. | ||
촉망받던 선수가 부상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영영 잊혀진 선수로 전락하기도 하고, 재기불능 판정을 받은 선수가 재활에 성공해 팬들의 박수를 받기도 한다. 유명 스포츠스타들의 재활을 담당했던 전문의들이 밝히는 ‘재활의 추억’을 소개한다.
LG 트윈스 ‘캐넌히터’ 김재현(28)은 지난 2002년 골반과 다리를 연결하는 고관절이 썩어 들어가는 희귀병으로 선수생명에 위기를 맞았다. 양쪽다리를 모두 쓸 수 없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는 썩은 양쪽 고관절을 모두 깎아내고, 금속덮개를 씌우는 대수술을 받았다. 구단을 비롯해 대부분의 야구인들은 김재현의 선수생명은 끝났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뼈를 깎는’ 고통을 이기고 지난해 그라운드에 다시 섰다.
김재현의 기적 같은 재기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바로 수술과 재활을 담당했던 유명철 박사(60·경희대 정형외과학교실).
“국내는 물론 미국까지 가서 모두 알아본 뒤 마지막으로 다시 나를 찾았어요. 아주 절망적인 모습이었죠. 일반인과 달리 다시 그라운드에 서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김재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 김재현이 입원한 병실에는 팬들의 선물이 가득 넘쳤다. 하지만 김재현의 머릿속에는 다시 뛰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6개월 뒤 최종 복귀 여부를 판정받기 위해 유 박사를 찾은 김재현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진료실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유 박사는 “(당시) 다시 운동해도 좋다고 말하자 긴장했던 김재현이 함성을 지르며 좋아했다”며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고마워했다”고 기억했다. 김재현의 재활을 담당했던 덕분에 야구에 관심이 없었던 유 박사는 그 뒤 LG 트윈스의 열혈팬이 됐다.
▲ 김남일 | ||
당시 김남일이 입원했던 일산 백병원은 난데없는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가야 했다. 월드컵스타를 보기 위해 수많은 10대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
당시 김남일을 진료했던 나영무 박사(42·메디메이저스스포츠재활전문병원 원장)는 “팬들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5천명이 쳐들어가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며 “진료를 무슨 비밀 작전을 하듯 했다”고 털어놓았다.
팬들과 기자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병원을 옮겼다’고 연막을 쳤는가 하면 진료를 한밤중에 진행하기도 했다. 나 박사는 “퇴근도 못하고 한밤중에 기다리고 있으면 김남일이 벙거지를 푹 눌러쓴 채 찾아와서 진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재활의학전문의인 나 박사는 김남일 외에도 수많은 국내 스포츠스타들의 재활을 도왔다. 특히 2002년에는 월드컵조직위 의무전문위원을 맡아 태극전사들의 재활을 전담하기도 했다. 그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가장 병원을 자주 찾은 선수가 이천수(23·레알 소시에다드)예요. 이천수는 조금만 아파도 치료를 받으러 왔으니까. 하루 건너 병원을 찾으니 코칭스태프나 동료선수들이 꾀병 아니냐며 곁눈질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천수가 가장 몸 관리를 잘하는 프로기질을 갖고 있어요. 프로라면 이천수처럼 몸을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국내 선수들은 웬만한 것은 참고 넘어가서 오히려 병을 키우거든요.”
일반적으로 프로선수들의 경우 재활에 본인뿐 아니라 구단 관계자들까지 큰 관심을 갖게 마련. 비중 있는 선수의 재기 여부는 구단 성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 유명 프로야구선수를 치료했던 한 전문의가 털어놓은 후일담.
지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출전할 드림팀 선수로 뽑혔던 A선수는 대회를 앞두고 골절 부상을 당했다. 개막이 6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최소 8주의 치료가 필요한 부상으로 사실상 출전이 불가능했던 상황. 이때 소속 구단의 구단주가 은밀히 담당의사를 찾아왔다.
‘어려운’ 걸음을 한 구단주는 담당의사에게 “그 선수는 우리 팀의 기둥이어서 반드시 병역면제를 받아야 한다”며 “(출전할 수 있도록) 4주 진단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고민하던 담당의사는 구단주의 요구를 들어줬고 이 선수는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 병역면제의 혜택도 거머쥐었다.
안순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