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당선자가 유세기간 내내 사정기관들에 대한 ‘굵직한’ 언급을 해온 탓이다. 국가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으로 여겨진 사정기관들이 국가지도자의 교체로 인해 내부적으로 동요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대대적인 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했던 전례가 있다.
그러나 유세기간 동안의 언급이나 대통령 당선자의 개혁적 성향을 볼 때 지난 97년보다 더욱 거센 폭풍이 각 사정기관에 몰아칠 것이란 분석이 제기되는 중이다. 가장 분위기가 달아오른 조직은 바로 경찰이다. 노 당선자가 선거 기간 동안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일선경찰서의 한 호남 출신 정보과 인사는 “솔직히 말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것이 반가운 건 사실”이라 밝힌다. DJ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찰 주요 보직에 호남 출신 인사들이 들어선 바 있다. 선거 이전 간부급 인사가 단행된 바 있는데 만약 이회창 후보가 당선됐을 경우 경찰 조직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 위상 강화와 함께 기존 조직의 질서를 크게 해치지 않을 인물로 경찰 조직 내부에선 이회창 후보보다 노 당선자에게 큰 점수를 줬다는 평이다.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장은 대법원장이 추천하여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 있으며 대통령이 지휘하고 기존 검찰조직으로부터의 독립이 명시돼 있다. 이러한 기관의 설치가 기존 검찰 조직의 위상 약화를 불러올 것이란 데에는 이견이 없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고위공직자 수사를 별도의 조직이 전담하게 되면 기존 검찰 조직은 날라리 양아치들이나 불러다 조사하라는 것 아닌가”라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찰과 달리 검찰가에 흐르는 불안한 정서는 하부 조직은 물론 고위급에까지 뻗쳐있다. 법무부 장관의 경우 어차피 새 내각이 들어서면 바뀔 것으로 예상된 것이지만 검찰총장은 DJ정부 임기 말에 임명됐기 때문에 일단 임기를 보장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나돈다.
그러나 노 당선자 주변과 검찰 안팎에 바꿔야 한다는 세력도 적지 않다. 그러나 김각영 검찰총장은 정치적 중립을 천명하고 실천을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회창 대세론’이 한창이었던 탓인지 “김 총장과 동문인 고대 출신 한나라당 의원들의 호감을 얻고 있다”란 소문이 한창 정가에 나돈 바 있다.
핵심간부인 ㅇ, ㅎ씨도 본인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한나라당과의 연관성이 제기된 인사들이다. 정가에선 신임 검찰총장 후보로 기존 검찰조직과 연관성이 적으면서 노 당선자와 성향이 맞는 인사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조폐공사파업유도의혹사건 수사담당 특별검사였던 강원일 변호사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상임집행위원장과 사법개혁위원회 위원을 거친 김일수 고려대 교수가 그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조직 내부에서 ‘김대업이 총장으로 올지도 모른다’는 해괴한 우스개 소리가 나돌 정도”라 분위기를 전했다. 이러한 정서 밑바닥에는 병역 수사와 관련해 노 당선자가 기존 검찰조직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지적이 맞물려있다.
국가정보원 조직 역시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노 당선자는 유세과정에서 국정원 조직의 대대적인 개혁을 논한 바 있다. 한 유세장에서 노 당선자는 “중앙정보부가 말썽이다. 안기부로 바꿔도 말썽이고 국정원으로 바꿔도 말썽”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은 국내사찰 업무를 일절 중지시키고 해외정보만을 수집, 분석해 국익을 위해 일하는 ‘해외정보처’로 바꾸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노 당선자와 민주당을 괴롭혀왔던 도청 의혹 역시 국정원 조직을 바늘방석에 앉게 하고 있다. 야당 인사들에 대한 국정원 도청 자료를 한나라당에서 제시해 국정원의 야당 사찰 의혹을 제시했지만 진위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바 있다. 그러나 국정원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제기된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선거 기간 도중 한나라당에 정보를 제공한 인사들은 모두 DJ정권 들어서 찬밥신세로 전락한 사람들 아니겠는가”라며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 기강 확립에도 중요한 국정원 조직에 대한 큰 손질은 없을 것”이라 밝혔다. 신임 국정원장 물망에 민주당 문희상 의원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현직의원을 국가 요직에 처음부터 노 당선자가 앉힐지는 미지수.
그러나 노 당선자의 의중을 잘 아는 인사를 통해 내부적으로 조용한 개혁을 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나오는 중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경찰의 수사권 독립이나 국정원 구조 개혁, 검찰 물갈이 인사 등이 예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급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DJ정권 들어 각 기관에서 도태된 일부 인사들이 한나라당에 협력했던 것을 감안하면 기존 조직 추스르기에 머물 수도 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