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리는 노는 법을 못배웠다. 곰인형을 끌어안고 자는 사춘기에도 오직 ‘골프 또 골프’였다. 하지만 그 덕에 지난 98년 US오픈 우승 트로피에 입맞춤할 수 있었다(사진). | ||
박세리의 동계훈련을 한국에서 지켜보는 아버지 박준철씨는 올해 박세리의 재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박세리의 마음가짐과 의욕이 이전 미LPGA 무대에 처음 데뷔했을 때와 비슷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골프중독 증세 나타나
잠깐,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세리가 미국 무대에 데뷔한 후 한동안 ‘박세리 신드롬’이 불 만큼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2000년에 우승을 한 차례도 못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세리가 어느 골프 연습장에서 퍼팅을 하다 말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빠는 왜 나한테 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골프 말고 다른 걸 하지도 못하게 했잖아!”
공이 안 맞을 때, 스윙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다른 골퍼라면 잠시 골프채를 놓고 친구들과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지만 세리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밥을 먹을 때도 골프채를 옆에 놓고 먹어야했고 잠시 쉴 때도 골프장 근처에서 놀아야 마음을 편히 가졌다. 최소한 어프로치라도 해야 밥숟가락을 입에 갖다 댈 만큼 골프에 집착했고 단 몇 시간이라도 골프를 안치면 정서 불안이 나타날 만큼 다소 심각한 증세를 보였다.
골프가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골프채를 놓지 못하는 세리의 심정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온 국민의 관심이 자신의 우승에 쏠려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강박관념과 골프를 떠나선 숨 쉬기조차 힘들어하는 상황들이 나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쏠렸다.
인정한다. 모든 게 내 탓이었다. 난 세리한테 노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로지 골프만 알고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고 세뇌시켰고 세리도 내 말을 따르고 쫓아왔다.
세리 통해 다시 태어났다
고2 때 세리한테 사춘기가 찾아왔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각 대회 우승을 휩쓸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세리는 늘 친구들이 그리웠다. 유일한 낙이라면 골프장에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세리의 표정이 어두웠다. 이성 문제나 외모를 꾸미고 가꾸는 것 등 마치 ‘딴 나라’같은 바깥 세상 얘기에 세리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것이다.
나도 세리한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남자 친구도 사귀고 다른 친구들처럼 외모를 가꾸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골프만 치게 했다. 왜? 세리가 세계적인 골퍼로 성공하려면 그런 ‘사소한’ 일상들은 무시하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처럼 모진 아빠도 없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어린 애한테 너무 심하게 구는 건 아닌가’하고 생각하면서 세리의 표정을 살필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엔 내 방법만이 세리를 미국에까지 데려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리가 올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런데 지면을 통해 먼저 밝히고자 한다. 난 세리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만약 세리가 아니었다면 내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세리의 인생에 내 인생이 덮어쓰기를 하면서 박세리와 박준철이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부녀지간이지만 다툰 적도 많다. 그러나 지는 건 항상 세리였다. 서로 싸우고 치고받아도 궁합이 맞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왔다고 믿는다. 그래서 난 세리가 너무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동안 모질게 굴어서 날 원망하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내 욕심대로 밀고 나갔던 아빠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삼성과의 만남은 새 전기
1995년 10월17일. 한국 골프계에 대이변이 벌어졌다. 세리가 다른 기업도 아닌 삼성물산과 엄청난 돈을 받고 공식 후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연봉 1억원에 계약금 8억원, 계약기간이 무려 10년이었다.
난 세리를 미국에 보내기 위해 오래 전부터 스폰서를 알아보고 있었다. 세리가 프로 데뷔 후 워낙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던 탓에 사실 스폰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단 한국에서 생활할 때보다 미국에서의 활동을 제대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삼성물산은 세리의 가능성만을 보고 아낌없는 투자를 해줬고 그게 바탕이 돼 세리는 96년 1월 미국 플로리다주의 올랜도로 날아가 세계적인 골프 레슨 프로인 데이비드 리드베터를 만나게 된다.
삼성과의 첫 만남이 잊히지 않는다. 삼성측에선 세리를 스폰서하는 데 대해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난 특유의 자신감을 무기로 “세리한테 투자하면 투자한 것 이상의 대가를 받을 수 있으니 안심하라”면서 “세리가 성공 못하면 내 성을 바꾸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결국 그 호언장담이 삼성에 믿음을 심어줬고 박세리가 골프계의 스폰서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도 됐다.
세리를 가르치면서 항상 돈 때문에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이젠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돈 한푼이 없어 지역의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던 내가 이제는 돈 걱정 없이 세리를 골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실로 행복했고,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