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시즌 연속 삼성화재를 꺾고 프로배구를 제패한 현대캐피탈의 김호철 감독이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다. | ||
술자리에서 풀어 놓는 우승 뒷담화를 듣기 위해 전남 해남까지 찾아간 기자에게 김 감독은 예의 그 현란한 입담과 제스처로 오랜 여정의 피곤함을 싹 가시게 했다. 지난 4월 5일부터 시작된 현대캐피탈배 전국대학배구 춘계대회를 보러 해남에 머물고 있는 김 감독과의 ‘취중 토크’를 소개한다.
기와집이 인상적인 전남 해남의 한 한정식집 앞에 수십 대의 승용차가 밀려들었다. 그중 검은색 승용차에서 반가운 얼굴이 내렸다. 소속팀 선수인 후인정과 함께 해남을 찾은 김호철 감독이다. 포스트시즌에 접어들면서 웨이브 퍼머 스타일로 변화를 준 김 감독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말로 ‘머리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했더니 “얼마 전에 좀 자르니까 한결 나아진 것 같다”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중요한 경기 전에는 머리는 물론 수염도 자르지 않는 감독들이 대부분인데 반해 김 감독은 시즌의 ‘점’을 찍어야 하는 결전들을 앞두고 삭발도 아니고 퍼머를 하는 ‘일탈’을 벌이며 배구팬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었다.
# 우승 뒷담화
김 감독은 미리 준비된 자리에 앉자마자 챔피언결정전 3차전 상황을 복기해 냈다. 좀 더 재미있게 경기를 진행하지 못했다는 부분과 많은 사람들이 4차전까지 가야 한다고 기대한 상황에서 3차전으로 ‘쫑’낼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1, 2차전에서 이겨도 불안했다. 삼성화재라는 팀이 쉽게 넘어가는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수들도 남은 3게임 중에서 한 번 정도는 이기겠지 하는 안도감을 갖고 있어 3차전 풀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가 잘했다기보다는 삼성화재가 무너졌다. 이전의 삼성화재 선수들은 경기에서 져도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굉장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삼성화재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감독이 처음 현대캐피탈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삼성화재는 빈틈이 없는 팀이었다고 한다.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삼성의 빈틈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삼성화재의 허점을 찾기보다는 현대캐피탈을 변화시켜야 삼성과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꿨다. 삼성화재 전에서 첫 승을 이루는 게 목표였던 게 어느새 정규리그 우승을 놓고 다투는 ‘신분 상승’을 하더니 지금은 챔피언결정전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는 등 4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 삼성화재가 패한 이유
김 감독은 아주 조심스럽게 삼성화재가 무너진 이유에 대해 분석해 냈다. 그런데 그 분석에 삼성화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삼성화재는 대단한 조직력을 자랑했던 팀이다. 그런데 기자들이 ‘괴물’이라고 부른 레안드로가 들어가면서 그 조직력이 와해됐다. 레안드로에 의존하는 공격 패턴이 계속 되다 보니까 다른 선수들의 자존심이 무너졌고 레안드로 또한 체력적인 열세에 노출됐다. 그로 인해 삼성화재다운 쌈박한 경기를 풀어내지 못했다. 선수들의 자신감 여부가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됐다.”
▲ 지난 3월 28일 승리 후 선수들과 ‘우승 포즈’를 취한 김 감독.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프로배구가 올시즌 흥행몰이를 한 데에는 김호철과 신치용 감독의 라이벌 관계가 큰 상승 작용을 했다. 김 감독이 현대캐피탈 사령탑을 맡은 이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해 왔던 신 감독은 좋으나 싫으나 김 감독과 마치 한 배를 탄 듯 연일 ‘묶임을 당해’ 함께 입에 오르내렸다. ‘42년지기’라는 수식어가 두 사람 관계에 ‘조연’ 역할을 했다면 공식 인터뷰에서 서로에 대해 ‘막말’을 서슴지 않는 톡톡 튀는 멘트들은 배구팬들을 경기장으로 끌어 모으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나랑 신 감독이 오랜 친구 사이인 건 맞지만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감정은 없다. 단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하게 되고 기자들 입으로 전달된 얘기에 감정을 담아 반응을 하는 등 신경 쓰이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내가 화난 일이 있다면 신 감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기자가 시합도 하기 전에 나랑 신 감독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 감독은 불이고 신 감독은 물’이라고. 불은 물에 지게 돼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열받은 내가 불도 불 나름이고 물도 물 나름이라고 받아쳤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 감독에게 챔피언결정전 끝나고 신 감독과 전화 통화라도 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 감독은 “일부러 전화 통화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면서 “누구보다 신 감독이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며 진심어린 안타까움을 내보였다.
김 감독은 두 사람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난 굉장히 다혈질이지만 돌아앉으면 엄청나게 냉정한 편이다. 반면에 신 감독은 겉모습에서 냉정함이 철철 흘러도 속정이 깊다. 더욱이 선수들에 대한 믿음이 크다. 가끔 선수들을 너무 믿는 바람에 발등이 찍힐 때도 있지만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무뚝뚝함 속에서 잔정이 많은 친구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가 아니라고 해도 김 감독은 ‘동업자 정신’을 떠올렸는지 신 감독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삼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구계에 그 사람만큼 많은 기록과 업적을 남긴 지도자가 없다. 스포츠는 질 때도, 이길 때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현대캐피탈이 우승했다고 해서 내년에도 우승하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경기에 졌다고 해서 감독의 자질까지 비난받아선 안 된다. 특히 한때 영웅처럼 떠받들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함부로 떨어뜨리면 안 된다.”
# 코트에서 ‘라이브 쇼’
김 감독은 좀처럼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는 스타일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건 다반사고 가끔 열받을 때는 양복저고리를 벗어 제치고 선수들을 다그친다. 175cm(?)의 작은 체구에서 열정을 다해 쏟아내는 몸짓은 마치 제스처가 아닌 춤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더욱이 벤치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코트를 응시하는 신치용 감독과 경기를 치를 때는 그의 현란한 몸놀림이 상대적으로 더욱 눈길을 잡아 끈다.
“내 성격상 선수들이 뛰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지켜보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기뻐하는 지도자가 지향점이었다. 물론 중심은 잃지 않는다. 처음엔 선수들이 마구 헷갈려 하며 적응하기 힘들어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벤치가 조용하면 더 힘들어한다.”
김 감독은 다른 종목에서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지도자로 LG 트윈스의 김재박 감독을 꼽았다. 과감하고 철두철미한 것은 물론 얄밉도록 지킬 것은 지키는 승부에다 언론 플레이 스타일까지 김재박 감독과의 유사성을 열거했다. 그러면서 “아, 맞다! 다른 팀과 싸움 붙이는 것도 좀 비슷하다”라고 말해 순간 폭소가 터졌다.
정상에 오른 지도자에게 ‘언제까지 감독 할 거냐’며 딴지를 걸어 봤다.
“앞으로 1년이든 2년이든 순발력이 있을 때까지만 할 것이다. 내가 정상에 있든 밑바닥에 있든 상관이 없다. 어차피 경기의 주연은 선수들이고 난 그저 조연 역할만 하기 때문에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김 감독은 성격상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하는 스타일이라 지난 번 도하아시안게임 우승을 끝으로 더 이상 대표팀 감독은 사양하고 싶다며 거듭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