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뉴스 | ||
#황당한 정전 사고
주경기장인 겔로라 붕카르노스타디움의 ‘붕카르노’는 1945년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애칭이다. ‘독립 영웅’을 기린 이곳에서 축구사의 길이 남을 정전 사고가 일어났다.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1차전 후반 40분께 운동장은 암흑으로 변했다. 전기 과부하로 인한 정전은 인도네시아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 25분이 지나서야 불이 들어왔지만 이번엔 전광판이 고장 났다. 본부석, 취재석 등의 인터넷도 한꺼번에 꺼져 일부 기자들은 기사 마감을 위해 호텔로 뛰어가는 소동을 벌였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운동장을 빠져나오던 선수들은 자동으로 열리는 출입구 문까지 작동하지 않아 가뜩이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한참을 돌아 다른 문으로 나가야 했다.
이날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은 한승주 전 외무장관 등 전직 장·차관, 대사 등 10명을 대동하고 경기장을 찾았다. 한·일월드컵 유치를 도와준 이들에게 외유성 보답을 한 것인데, 축구장 정전이란 쉽게 볼 수 없는 깜짝 선물까지 안겨주게 됐다.
#가고 싶긴 하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순박한 국민성을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축구장에 오면 확 달라진다. 축구 관심이 높아 한국 기자들에게 “박지성은 왔냐?” “설기현, 안정환은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축구를 보다가 흥분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엔 관중들이 운동장에 돌멩이를 던지고 서로 싸움을 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은 현지 축구협회를 찾아가 응원을 가는 교민들의 안전 대책을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한인신문들도 축구가 끝난 뒤 으슥한 곳에 혼자 가지 말라는 등의 수칙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일 인도네시아전 만큼은 축구장 나들이를 망설이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한 교민은 “94년 올림픽 예선 때 대표팀이 자카르타에 온 이후 13년 만에 이곳에서 하는 경기다. 그런데도 인도네시아전 때는 집에서 보거나 전반전만 보고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자칫 경기가 과열돼 괜한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탓이었다.
# ‘훈련장 보이콧’
대회 개막 전 D조 4개국 팀 매니저 미팅이 열렸다. 그 중엔 유니폼을 각각 어떻게 입을까도 중요한 회의 과제였다. 그러나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한국-바레인-인도네시아가 모두 붉은 색 유니폼을 고유색으로 가졌고, 이 색깔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어지던 회의는 사우디 쪽의 투정 섞인 불만 덕에 정리가 됐다. 주 유니폼이 녹색이어서 붉은색과 전혀 상관없는 사우디가 “빨리 좀 끝내자”고 불평을 털어놨기 때문이다. 머쓱해진 나머지 3개국은 조금씩 색깔을 양보하기 시작했고 개최국 인도네시아도 한국과의 3차전 때 붉은색을 한국 쪽에 넘기는 결단을 내렸다.
한 목소리를 낸 안건도 있었다. 며칠 뒤 열린 회의에선 “폴리스스타디움 훈련장에선 연습하지 않겠다”가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잡풀 같은 떡잔디에다 땅도 울퉁불퉁해 바레인 선수가 다치는 등 부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베어벡 감독도 공격수들이 땅이 고르지 않은 곳에서 발을 다칠까 걱정돼 헤딩슛과 바운드되기 전 발리슛 위주로 연습하다 급기야 “쉬는 게 낫다”며 두 차례 훈련을 취소하기도 했다. 축구시설이 열악한 곳에서 대회가 열리다보니 ‘훈련장 보이콧’까지 나오고 있다.
#2002 월드컵 따라하나
5년 전 한·일월드컵 개최국 한국을 보는 듯했다. “오늘 밤까지만 승리를 만끽하겠다. 아직 D조 2경기가 남아있지 않은가?” “그들은 전사들처럼 싸웠고, 승리할 자격이 있음을 그라운드에서 보여줬다.” 불가리아 출신 이반 콜레프 인도네시아 감독이 1차전 승리 뒤 남긴 이 말은 “오늘 밤 와인을 마시며 이 승리를 느껴보겠다”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어록을 떠올리게 한다. 첫 골을 넣고 감독 품으로 달려간 플레이메이커 부디 수다르소노는 박지성이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히딩크를 껴안던 그 장면과 같다. 붉은 옷을 맞춰 입고 7만 관중이 인도네시아를 외치고, 바레인전 승리 후 경기장 밖 차량 위로 올라가 환호하는 것까지 5년 전 한국의 거리와 흡사하다.
자카르타=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