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시즌 내내 웃는 얼굴보다 굳은 표정을 더 많이 보였던 박기원 감독. 28년 만에 화려한 국내 복귀를 꿈꿨던 그의 바람은 지지부진한 팀 성적으로 인해 차마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만큼 비참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현재 자신의 상황을 ‘괴롭다 못해 외로울 정도’라고 표현한 박 감독을 김상우 위원이 구미로 찾아가 만났다.
김상우(김): 요즘 많이 힘드시죠? 구미로 오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았어요.
박기원(박): 성적도 안 좋은데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인터뷰를 해. 말을 하면 할수록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김: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 아니시잖아요. 한국에 들어오시면서 많은 계획도, 포부도 있으셨을 텐데 현재 나타나는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죠?
박: 그렇지…. 처음에 선수들을 만나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대화를 나누는 방법의 차이였어. 나도 어렸을 때 한국식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지만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한국 선수들의 운동 환경을 잠시 잊어버린 것 같아. 선수들에게 강압적인 지시보다는 같이 의논해서 뭔가를 끄집어내고 싶은데 선수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아.
김: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배경이죠.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감독님에게 복종하면서 운동을 배웠잖아요. 아무리 박 감독님께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해도 100% 솔직할 수 없는 게 선수들 입장이에요.
박: 그래서 내가 바뀌어야 할 것 같아. 선수들이 내 눈높이에 맞춰주길 기대하기보단 내가 선수들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걸 절감했고 조금씩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이야.
김: 현재 LIG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라고 보세요?
박: 감독이 가장 큰 문제지 뭐(웃음). 근본적으로 서브리시브와 수비가 약하니까 쉽게 무너지는 것 같아. 우리 패턴이 상대팀에게 완전히 노출된 상태거든.
김: 코보컵 끝나고 개막 전까지만 해도 우승 후보였는데, 선수들 마음이 힘들겠어요.
박: LIG가 오랫동안 하위팀에 머물면서 선수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패배의식이 자리하고 있어. 조금만 치고 올라가면 될 것 같은데도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거든. 세터인 (이)동엽이와 팔라스카가 호흡이 안 맞는 것도 큰 문제야. 팔라스카가 빠른 볼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높은 볼은 안 되거든. 동엽이도 팔라스카에게 맞춰주려고 최대한 노력하면서도 이상하게 불편해지는 거지. 그러다보니 스트레스만 쌓이게 되고. (이)경수가 살아나면 용병이 죽고,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하는 세터는 자꾸 늪에 빠지는 것 같고…. 총체적인 난국이란 표현이 딱 맞네.
김: 나름대로 외국에서 능력있는 지도자로 평가받으신 탓에 지금의 성적표가 감독님에게 보이지 않는 ‘상처’로 자리 잡을 것 같아요.
박: 진짜 자존심 많이 상해. 가급적이면 배구하는 사람들 만나려 하지도 않아. 다 내 후배들(다른 팀 감독들)인데 정말 심적으로 힘들어. 내 사정을 아는 회사에선 ‘혹시 감독이 중간에 포기할까’ 걱정한다고 들었어. 나도 한계선까지 올라왔어. 배구하면서 이렇게 많이 져본 건 처음이거든.
김: 다른 감독님들과는 자주 통화도 하고 그러세요?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분들이시잖아요.
김: 김호철 감독도 현대캐피탈을 처음 맡았을 때 여러 가지로 힘드셨을 거예요. 혹시 조언을 구하신 적이 있나요?
박: 경기 내용에 대해선 얘기하기가 그렇잖아. 하지만 이렇게 물어본 적은 있어. ‘넌 처음에 어땠냐? 라고. 김 감독 왈, “형, 똑같았어요. 저도 처음에 그런 과정을 밟았어요. 하지만 참을성 있게 하나 둘씩 만들어가야 해요”라고.
김: 이번 시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년에 LIG를 어떻게 끌고 가실지 궁금해요.
박: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지만 난 이미 내년 시즌을 준비하고 있어. 선수 구성에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야. 용병이 바뀔 수도 있고 다른 선수를 교체할 수도 있고. 이번 시즌에 아픔을 많이 겪었지만 그 아픔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봐. 내년에도 이렇게 갈 수는 없잖아. 다음 시즌에는 분명 달라질 거야. 선수들도, 감독인 나도 달라지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박기원 감독은 선수들에게 ‘싸움닭’ 같은 근성과 오기를 주문했다. 코트에서 성질도 부리고 감독에게 대들다가 부딪혀서 깨지고 터지는 선수도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이상 ‘샌님’같은 배구를 해선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더 덧붙인다.
“난 선수들 등 뒤에 숨는 비겁한 지도자가 되긴 싫어.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욕을 먹는다면 내가 선수들의 ‘총알받이’가 될 자신 있거든. 더 이상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순 없잖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잠이 안 와.”
구미=KBS N 스포츠 해설위원
정리=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