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후에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유명우가 최근 KBC사무총장직을 맡기로 결심을 굳혔다. | ||
프로복싱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박찬희 장정구 박종팔 유명우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의 세계타이틀전이 열릴 때는 거리에 사람이 안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한국권투위원회 수장도 정치인들이 탐을 냈다. 1950~60년대 장택상 유진산 등 거물 정치인이 프로복싱의 꼭대기에 있었고, 이후 1990년대 초까지도 양정규 이익순 구천서 등 거물들이 회장 자리를 맡았다. 하지만 그후 날로 가속화되는 흥행침체와 함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특히 지난해 4월 <일요신문>이 단독 보도한 ‘현역 세계챔피언 지인진(WBC밴텀급)의 K-1행’은 프로복싱 침체에 결정타가 됐다.
현재는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한 중견정치인인 김철기 회장이 지난 2008년 1월 1일부터 20대 회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또 고(故) 최요삼을 가르쳤던 조민 숭민체육관장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프로복싱 중흥을 위해 링에서 처절한 경기를 펼치다 사망한 최요삼의 투혼을 계기로 KBC가 새로운 각오를 다졌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가시적인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젊은 복싱인들 사이에서 ‘유명우 사무총장론’이 나왔고, 최근 본인이 이를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심을 한 것이다. 유명우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9월 이사회까지 시간이 있기 때문에 아직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프로복싱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정과 자부심이 크다. 부족하지만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사무총장은 스포츠기구의 실무 총책임자로 타 단체에서는 전무이사나 실무부회장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로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맡는 회장을 제외하면 경기인 출신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인 것이다.
사실 유명우 사무총장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년 전부터 복싱계 안팎에서 “유명우를 중심으로 한국복싱이 뭉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WBA 주니어플라이급에서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 36연승(통산 38승1패 14KO), 리벤지 타이틀매치에서 승리한 후 명예로운 은퇴, WBA 올해의 복서 선정(1991년) 등 유명우의 선수경력은 한국을 넘어 세계 복싱사에 기록될 정도다. 선수 때 한 번도 계체량을 통과하지 못한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함의 화신’이었듯 사회인으로도 사업가와 복싱 프로모터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많은 세계챔피언이 은퇴 후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여기에 사생활이 모범적이고, 인품도 뛰어나니 선후배들이 ‘유명우’를 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KBC 유명우호(號)’는 본인이 결심을 하고, 수락을 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김철기 회장 등 현 KBC의 집행부도 유명우의 가세를 적극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 유명우가 그리고 있는 한국복싱의 중흥은 어떨까. 답변은 신중했다. “나 혼자의 힘으로 프로복싱을 되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뛰면서 복싱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이끌어내고, 또 좋은 선수를 발굴하고, 좋은 경기를 많이 만들어내겠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침체된 복싱이 조금씩 다시 살아날 것으로 확신한다.” 유명우다웠다.
끝으로 그동안 왜 복싱과 다소 소원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유명우는 “원래 성격이 무슨 일이든 드러내놓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업도 열심히 했고, 체육관에서 선수들도 가르쳤고, 또 프로모터로 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며칠 전 관악구에서도 프로복싱 대회를 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또 KBC에서 중책을 맡는 것은 지금까지 나이가 다소 어리다고 생각했기에 주저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였지만 이제는 ‘잊혀진 종목’이 된 한국 프로복싱. 앞으로 ‘들소’ 유명우를 중심으로 중흥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지 그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