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올림픽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은 쿠바 선수가 심판을 향해 발차기를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 ||
사태 파악 못하는 WTF
쿠바의 마토스가 8월 23일 베이징올림픽 태권도 마지막 날 선보인 ‘심판에게 발차기’는 해외토픽감이었다. 태권도 사상 처음은 물론 올림픽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WTF는 전체적으로 판정은 공정했고, 심판 폭행은 ‘한 개인의 우발적인 실수’라고 일축했지만 전 세계의 반응은 뜨겁기만 했다. 마토스의 심판 폭행에 앞서 경기가 끝난 후 약 1시간에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는 초유의 판정번복 사태가 있었고, 또 이에 앞서 숱한 판정시비가 빚어졌다. 이런 모든 것의 결정판으로 ‘마토스의 심판 차기’가 나왔으니 경기장 관중이 마토스에게 박수를 보낼 정도로 심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WTF는 8월 23일 저녁 만찬에서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성공적인 대회”였다고 자평했다. 판정번복도 공정성에 대한 WTF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자화자찬했다. 당시 심판위원장을 맡았던 고의민 WTF 기술심의회의장은 “2006독일월드컵에 지단의 박치기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것처럼 이번 심판 폭행도 언론 노출에서는 대성공을 거뒀다”는 황당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9월 4일 태권도의 날 행사 때다. WTF가 ‘태권도 위기론’을 부추기는 것은 악의적인 태도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축사를 통해 “현재 태권도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라고 명쾌하게 말해 버렸다. 다음 연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조정원 WTF 총재 바로 앞에서 말이다. ‘위기론’을 확산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주무부서 장관이 위기론을 공론화해 버렸으니 WTF는 당혹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연임이냐 새 인물이냐
어쨌든 WTF의 권위는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많이 추락했다. 이전 ‘맨체스터 돈 봉투 사건’, ‘UAE 공주에 대한 와일드카드 특혜’, ‘노조 문제’ 등으로 시끄러웠지만 올림픽 심판판정 문제로 장악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평가다. 실제로 이미 유럽연맹과 아시아연맹은 현 WTF 집행부에 등을 돌린 상태다.
▲ 조정원 총재(왼쪽)와 최태원 회장. | ||
여기에 ‘친 김운용계’로 분류되는 박수남 WTF 부총재(영국태권도협회장)가 9월 초 공식적으로 출마의사를 밝혔고 오경호 충청대학 이사장, 이대순 태권도진흥재단 등 다수의 인물이 자천타천으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3후보론’이다. <일요신문>이 지난 8월 24일자에 보도한 것처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한국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도전장을 낸다면 최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조정원 총재는 2004년과 2005년 총재선거에서 참여정부의 후광에 힘입어 기존 WTF 내 후보군을 제치고 총재로 당선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태권도계에서는 글로벌 기업의 총수가 수장으로 취임하면 태권도 발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는 여론이 일부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끊이지 않는 자리싸움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6월 대한태권도협회장으로 취임했다. 전임 김정길 회장이 정권이 바뀌면서 잠시 저항을 하다 결국 자진사퇴한 후 MB정부의 실세 정치인이 이를 접수한 것이다.
회장이 바뀌면 집행부도 바뀌는 것이 관례지만 대한태권도협회는 양진방 전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올림픽을 앞두고 집행부 교체를 연기했다가 이 과정에서 양 전무가 홍준표 회장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참여정부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정길 체제에서 최고 권력을 휘두른 인사가 계속 자리를 유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태권도계 내부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홍준표 회장은 최근 폐지 방침이 정해졌던 국방부장관기태권도대회를 ‘간단하게’ 다시 존속하도록 만드는 정치력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국방부가 실세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기존의 폐지 방침을 재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법인화 과정을 밟고 있는 국기원은 ‘수장’ 자리를 놓고 연일 시끄럽다. 엄운규 원장이 서울시태권도협회 산하 대외협력단의 공격을 받은 끝에 지난 7월 사표를 냈다. 이사회와 주무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가 만류했지만 엄 원장은 사퇴 의사를 꺾지 않고 있다. 사표를 낸 상태에서 인수인계를 이유로 국기원에 들락거렸지만 이마저도 구설에 오르자 아예 승용차까지 반납하며 ‘올해 안에 퇴임식을 갖겠다’고 선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엄운규 원장의 반대편에 서온 서울시태권도협회 측은 특정 인사를 차기 국기원장으로 만들려는 노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특정인사가 유명한 주먹 세계 출신으로 전과까지 있다는 점이다. 국기원 임원에 대한 자격 조항을 보면 이 인사는 규정상 국기원장이 될 수 없다. 이에 국기원 측이 규정을 놓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