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정지원(정): 최근 전자랜드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최희암(최): 선수들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특히 서장훈이 6연패 당한 후 올스타브레이크 때 많은 생각을 했나 봐요. 요즘엔 명확한 논리로 후배들을 리드하고 있더라고요. 지난 번 SK한테 패한 후 장훈이가 후배들을 질책한 적이 있었는데 경기 후 다 모아놓고 직접 사과를 하면서 서로 간에 신뢰감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정: 최근 서장훈 선수의 플레이는 정말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요.
최: 장훈이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선수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존중해 주고 수용해 주면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는 친구예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분명하거든요. 대다수가 장훈이를 감정에 치우치는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학 시절부터 무척 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스스로 인정을 하면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에요. 최근 여자 친구가 생긴 것도 또 하나의 동기 부여가 됐을 거예요. 자신이 어떤 선수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겠죠.
정: 그동안 서장훈 선수가 여러 감독들과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었는데 전자랜드에 와서는 대학 시절 스승이라서 그런지 최 감독한테 잘 맞추면서 가는 것 같아요?
최: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죠. 제가 대학시절 은사였던 것도 사실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때로는 저도 장훈이를 야단치지만 궁극적으로 솔직한 대화가 되거든요. 소통의 성과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장훈이가 제게 불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오해는 없을 거예요. 일단 목표가 같잖아요. 저나 장훈이나 올 시즌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절대목표가 있어요. 가는 방향에 대한 차이는 있어도 도착 지점이 같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질 않죠. 예전에 대학 감독이었을 때는 저도 선수들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했죠. 하지만 프로 감독은 쌍방향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 최 감독은 90년대 연세대를 이끌면서 무적함대를 구축했었는데 프로가 없던 그 시절에 실업 챔피언 최강팀 기아를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켰어요.
최: 제 기억으로는 90-91 농구대잔치 예선에서 기아를 물리쳤어요. 당시 연세대 멤버가 정재근, 이상범, 오성식, 김재훈, 문경은이었죠. 허재, 김유택, 강동희, 유재학, 강정수, 정덕화 등 최강의 멤버들이 기아의 전성기를 이끌던 시절이었어요. 동점 상황에서 경기 종료 3.9초전에 현 KT&G 감독 대행인 이상범의 버저비터가 승부를 갈랐죠. 하지만 4강에서 탈락했어요.
정: 연세대가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했던 기억도 나는데요. 그건 몇 년 뒤였나요?
최: 3년이 흐른 93-94농구대잔치였어요. 당시 멤버는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우지원, 김훈이었죠. 허재가 이끄는 기아가 다소 하향세에 접어든 시점이었어요. 그래도 힘든 승부를 펼쳤죠. 연장까지 가는 혈전을 치렀고 종료 1.9초 전 김훈의 레이업 슛 성공으로 1점차 승리를 거뒀어요.
정: 그러고 보면 프로무대의 스타들 대부분이 연세대에서 최 감독의 지도를 받은 셈인데 어떻게 그런 선수들을 다 스카우트해서 키우셨나요?
최: 제가 1986년 3월에 연세대 코치로 부임했는데요. 당시에는 후임 감독이 올 때까지만 팀을 맡는 한시적 성격의 감독 대행이었어요. 그런데 17년 만에 후임 감독이 오더라고요(웃음). 처음에는 잘 가르치고 열심히만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올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죠. 좋은 선수를 모으는 것이 70%이고 잘 가르치고 관리하는 것이 30%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스카우트에 힘을 쏟게 되었어요.
정: 혹시 우리가 잘 모르는 스카우트 비화가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최: 문경은 선수 얘기를 해볼게요. 당시 경은이는 광신상고에 다녔는데 농구부장이 경희대 농구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래서 광신상고 선수들은 경희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제가 직접 농구부장을 만나보니 문경은을 데려가고 싶다고 한 감독은 처음이라는 거예요. 저도 놀랐어요. 아마도 다른 대학 감독들은 광신상고와 경희대와 관계를 의식해서 미리 포기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경은이를 데려가려면 동기생 4명을 다 데려가야 한다는 거예요. 순간 큰 결심을 했죠. 다 받아들이기로. 결국 경은이를 포함해 3명을 데려왔어요.
정: ‘연대 감독’의 상징이었던 최 감독이 2002년에 프로팀으로 옮기게 되는데 결심이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최: 전 늘 평생을 농구 선생으로 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직업을 교육자라고 믿었고 선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사실 그 전에도 몇 차례의 프로팀 감독 제의가 있었죠. 하지만 와이프가 “남의 자식만 키우지 말고 이젠 본인의 자식 교육에도 힘을 쓰세요”라는 말에 그런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프로에 가면 항상 성적에만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제 아이들에게 신경을 못 쓰잖아요. 그러던 중 큰 아이가 2002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프로행을 결심했죠. 사실 대학 감독 봉급이 프로 감독 연봉의 40%만 됐어도 전 학교에 남았을 거예요. 대학 감독의 봉급은 프로 감독 연봉의 10~15%밖에 되질 않거든요. 연대 감독 시절에 남들은 제가 부유할 거라고 보는 분들이 많았어요. 지인들 경조사 때 축의금 3만 원 정도 내는 게 딱 제 형편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하면 욕먹는 경우가 많았어요(웃음). 유명해지면 돈도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프로행을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였죠.
프로와 첫 인연을 맺었던 울산 모비스에서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뒤 잠시 동국대 감독을 맡아 다시 학교로 돌아온 최희암 감독. 본인은 그 시절을 ‘회춘한 1년’이라고 회상한다. 그 시절 뒤늦게 깨달은 리더십을 지금 전자랜드에 적용하고 있다. 전자랜드의 평생 숙원인 플레이오프 진출여부가 이제 그의 손에 달렸다.
CJ미디어 아나운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