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제자가 스승을 상대로 고소를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 스승이 자신을 두들겨 팼든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든, 그래도 고소를 하면 욕을 먹더라고요. 이 코치한테 맞은 것도 아팠지만 대질심문 중 검사 앞에서 이 코치가 저를 향해 ‘인간쓰레기’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제자가 선생을 때리느냐면서요. 제가 한 대라고 때렸으면 덜 억울하겠어요. 그런데 그 분도 함께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며 절 고소했었거든요.”
이석 코치는 대한체육회가 이미 자신에 대해 징계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김승구를 폭행혐의로 맞고소했고 검찰 조사를 통해 이 또한 무혐의로 결정났다. 이 코치는 대한체육회가 내린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의 효력을 일단 정지해달라며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는데 서울 동부지법 민사21부는 지난 2월 12일 징계 정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당시 재판부는 “폭력 사실이 인정되고 폭력의 불가피성을 강변하는 등 반성의 기미가 없는 데다 체육계 선수인권 보호 차원에서 폭력 근절의 필요성이 매우 큰 점 등을 볼 때 징계 절차, 내용상 하자가 없다”고 설명한 바 있다.
▲ 김승구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린 폭행 증거 사진. | ||
2008년 12월 13일, 11시20분 홍콩으로 출발하려던 펜싱대표팀은 김승구의 흡연 장면을 목격한 이석 코치로 인해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이미 김승구가 ‘죄송하다’고 잘못을 시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코치가 다른 탑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욕을 퍼부으며 김승구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그 자리엔 선수들은 물론 대표팀 코칭스태프도 모두 같이 있었다.
“물론 담배를 피운 건 잘못이지만 제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좀 있으면 서른 살이 되는 사람인데 마치 죽을 죄를 지은 사람마냥 폭언을 퍼붓고 구타를 하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순간적으로 전지훈련은 물론 선수 생활도 그만두려했었습니다. (박)민태(화성시철) 형이 만류하고 달래서 가까스로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숙소에 들어가서 더 난리가 났었죠.”
홍콩의 한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이 코치로부터 호출을 당한 김승구는 박민태와 함께 이 코치의 방을 찾았다. 이 코치는 박민태를 나가라고 했고 혼자 남은 김승구한테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이 코치 방을 찾아갈 때만 해도 무조건 ‘잘못했다’라고 말하려 했어요. 제가 그러지 않으면 다른 선수들까지 힘들어질 것 같아서 꾹 참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다짜고짜 무릎을 꿇으라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예?’라고 말했더니 재떨이를 던지고 개 패듯이 때렸어요. 나중엔 원탁 테이블을 들어서 내리치려고 하기에 그때 처음으로 막았어요. 그 순간 다른 코치가 들어오셨는데 처음엔 그냥 보고만 있으시기에, 제가 ‘제발 좀 말려주세요’라고 했어요.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그제야 막더라고요. 그때 다시 무릎 꿇으라고 해서 그땐 꿇었습니다. 그 후 또 정확히 눈을 때렸고 발로 복부를 가격했어요.”
이 장면은 모두 그 방에 있었던 A 코치가 목격을 했지만 그 코치는 경찰조사에서 “서로 뒤엉켜 있었을 뿐 이 코치가 선수를 때리진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제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김승구와 함께 이 코치 방을 찾았던 박민태. 그는 이 코치의 방문 밖에서 김승구가 맞는 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고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 이 부분에 대해 사실대로 진술을 했다.
▲ 지난해 말 펜싱국가대표팀 ‘구타 스캔들’의 피해자인 경기도 화성시청 소속 김승구.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정말 화가 났어요. 나이 20대 후반의 선수가 담배 피운 게 그렇게 죽을 죄인가요? 설령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해도 선수를 그렇게 두들겨 패는 게 정당한 건가요? 그런데도 누구 하나 말리는 분이 없었어요. 그러면서 무조건 저더러 참으라고만 했습니다. 이 코치는 코칭스태프 중에서 제일 막내예요. 그런 분을 다른 코치들과 감독님도 어찌하질 못하는 거죠. 왜 그러는 줄 아세요? 이 코치가 협회 고위관계자 아들이거든요.”
실제로 이석 코치는 대한펜싱협회 이광기 부회장의 아들이다. 선수 생활 은퇴 후 서울체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코치에 발탁됐다.
다음 날 김승구는 코칭스태프를 찾아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자신의 의견을 나타냈고 심재성 총감독을 비롯해 코치진들은 김승구를 설득하며 ‘내일 오전에 협회 김국현 부회장이 홍콩으로 들어오시니까 김 부회장을 만나 다시 얘기해보자’고 말했다. 이미 여권을 빼앗긴 김승구는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전 10시에 온다는 김국현 부회장이 밤 10시에 온다고 전해 들었을 때 김승구는 ‘또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얼굴 붓기도 가라앉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린 거죠. 안 되겠다 싶어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아버지한테 자조치종을 설명했더니 큰 충격을 받으시더라고요. 아버지가 당장 홍콩영사관으로 전화를 거셨고 급기야 영사님이 호텔로 찾아오셔서 저랑 코치들을 면담 후 1차 조사를 끝낸 다음에 심 감독님이 갖고 있던 여권을 뺏어서 저한테 돌려주셨어요. 제 모습이나 상황을 외부인이 본 건 그 영사님이 처음이에요.”
#홍콩 영사 의혹 해소 한몫
김승구가 대한체육회는 물론 검찰 조사에서도 무혐의 결과를 얻어낸 데에는 그 영사의 진술이 컸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 진상 조사를 벌인 내용을 상부에 보고를 했고 이후 경찰 조사에 이 보고서가 첨부돼 큰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
펜싱협회는 당시 김국현 부회장을 홍콩으로 급파하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지만 협회 자체 조사 결과는 어이없는 수준이었다. 이 코치는 폭행 사실을 부인했고 현장에 있었거나 나중에 김승구의 얼굴을 확인했던 코칭스태프는 모두 가벼운 몸싸움은 있었지만 폭행은 없었다고 진술했던 것. 그러나 대한체육회 선수권익보호팀의 진상 조사 결과 코치들의 진술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났다. 협회 부회장 아들이란 사실 때문에 협회 차원에서 조직적인 사건 은폐·축소 기도가 있었다는 김승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하는 부분이다.
#자격정지 뒤에 지도자 생활
더욱이 이 코치는 최근까지 양구군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은 사람이 실업팀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한체육회 선수권익보호팀에선 대한펜싱협회에 관리를 더 철저히 하라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펜싱협회에선 양구군청에 문의를 해본 결과 이 전 코치가 그곳에서 감독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이 전 코치는 한 인터뷰를 통해 지속적인 지도가 아니라 잠깐씩 봐 주는 차원이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한 펜싱관계자에 의하면 “지금 강원도도민체전이 열리고 있는데 이 코치가 양구군청 펜싱팀을 이끌고 체전에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기자가 양구군청에 이런 내용에 대해 사실 확인을 요구했더니 담당자는 “개인적으로 현장에 가볼 수는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팀을 이끌고 있진 않다. 지도자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에 팀을 이끌 수 없지 않나”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선수들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종종 관람객의 자격으로 경기장에 나타날 수는 있다고 본다”라고 덧붙였다.
김승구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난다고 해도 민사소송은 물론 당시 폭행을 묵인했던 다른 코치들에 대해 또 다른 대응을 하겠다고 한다.
“절 때린 사람보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거나 아예 그런 일조차 없었다고 말한 사람들이 더 밉습니다. 만약 제가 홍콩에서 영사의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당시 폭행당한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두지 않았다면 제 말은 모두 거짓말이 됐을 거예요. 힘없고 가진 게 없는 선수라고해서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김승구는 소송을 진행하면서 주위 사람들은 물론 소속돼 있는 팀의 고위 관계자로부터 이런저런 회유와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 된 진상을 알고 난 뒤에는 모두 김승구의 용기있는 행동에 격려를 해줬다고.
“제 인생이 달린 문제예요. 그래서 싸우는 겁니다. 선수도 인간이에요. 아무리 지도자라고 해도 인격적인 모욕과 폭행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승구는 현재 청원군청에서 사격선수로 활동 중인 윤인선과 내년에 결혼할 예정이다. 2주 후에 있을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통해 멋지게 재기에 성공하고 싶지만 마음이 복잡하다보니 운동에 집중이 안 된다며 한숨을 내쉰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