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열렸던 K-1 MAX 코리아 대회에서 지인진(오른쪽)과 가류 신고의 경기. 지인진은 대회 1주일을 남겨놓고 개인사정이 생긴 최용수를 대신해 링에 올랐다가 결국 판정패를 당했다. 뉴시스 | ||
# 계약금 지급시한 넘겨
지인진과 K-1이 본격적으로 갈등을 일으킨 계기가 있었다. 올 3월 한국에서 열린 K-1 MAX 코리아 대회다. 이 대회 출전 예정이던 절친한 선배 최용수(37)가 개최 1주일을 남겨 놓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결장할 수밖에 없게 되자 지인진이 최용수 대신 링에 오른다. 준비기간이 일주일도 안 되는 상황에서 출전한 지인진은 일본 킥복서 가류 신고에게 판정패하고 만다. 실망한 팬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사실 대회 후에 발생했다. 계약서상 계약금을 주기로 한 기한이 3월 말까지였다. 하지만 K-1은 기한을 넘긴 채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지인진은 K-1 주최사 FEG의 한국 지사인 FEG 코리아 측에 약속한 계약금 지급을 이행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지사는 아무 힘이 없으니 본사에 직접 이야기 하라”는 것이었다. “소송하겠다”고 으름장도 질러 봤지만 “소송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는 ‘친절한’ 조언을 들었다.
감정이 상한 지인진은 “계약금 1억 원 중 3월 대회 출전으로 받은 2000만 원을 제외한 미지급 잔액 8000만 원을 지급하라”는 1차 내용증명을 FEG에 발송했다. 이후 K-1 측에선 “줄 수 없다”는 취지의 서신을 보냈고, 양측의 문서를 통한 승강이가 몇 차례 이어졌다. 급기야 지인진이 최근 K-1으로부터 받은 문서에는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일방적 통보가 담겨 있었다.
# K-1 상술의 희생양?
지인진이 K-1에 요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계약서대로 계약금을 지급할 것, 둘째는 경기 출전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기자와 접촉한 지인진은 “1년에 두 번이면 두 번, 세 번이면 세 번 출전 횟수를 보장해 줘야 그에 맞게 수익도 기대하고 훈련도 할 수가 있다”며 “그러나 K-1은 둘 다 보장해 주지 못하겠다고 한다”며 한숨을 내쉰다.
K-1 측에서도 기자의 사실 확인 전화에 “지인진과 소송 중인 것은 맞다”며 “지인진이 K-1에서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이름값도 못한 상태에서 돈만 내놓으라고 하는 건 억지다”라고 강조했다.
지인진은 “프로야구만 보더라도 연봉은 성적에 대한 기대치다. 설령 ‘먹튀’ 소리를 들으며 기대치에 떨어졌더라도 그해에 주기로 한 돈은 다 지급한다”며 “그런데 K-1은 약속한 돈을 기한 내에 주지 않다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며 돈을 못주겠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지인진은 친구보다 더 친한 선배 최용수가 등 떠밀리듯 석연치 않게 은퇴하게 된 데 대해 더 감정이 상했다. 최용수는 2006년 9월 데뷔전 KO승 이래 2007년 2월 나스 요시하루 전, 같은 해 7월 스즈키 사토루 전까지 3연승을 달렸고, 역시 같은 해 12월 31일 K-1 신년전야 이벤트 다이너마이트에서 일본 최강 마사토에게 3회 TKO로 지면서 단 한 번 패배를 기록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2008년에는 아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2009년 3월 경기 또한 ‘돈을 받지 말고 뛰라’는 무리한 요구를 받고 출전을 철회해야 했다. 이때 거짓 깁스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일로 최용수는 사실상 K-1과 계약이 끝나고 말았다.
지인진이라고 최용수보다 사정이 나을 게 없다. 지난해 2월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지만 만 1년이 지나 ‘땜빵’식으로 출전하기까지 긴 공백을 가졌다. 설상가상 최근 마사토가 단 한 경기를 더 뛴 뒤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이래 K-1 측은 ‘희생양은 더 필요 없다’는 듯 그를 야멸차게 내치려고 하고 있다. 계약서상 계약기간이 내년 2월까지인 사실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
# 피해자 한둘 아니다?
K-1은 17년을 이어온 세계적인 격투기 대회지만 자금 부문에 있어서는 투명하지 못하다. K-1 창설자이며 아직도 막후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시이 가즈요시 씨가 수십억 원을 탈세한 혐의로 실형을 살고 나온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엔 선수들의 대전료를 체납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 4월 게가르 무사시 전을 끝으로 미국 UFC로 이적한 ‘슈퍼코리안’ 데니스 강도 몇 차례 경기 대전료를 제때 받지 못했던 것이 이적 이유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다. 국내 격투기 소식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심지어 국내 대표급 파이터인 최홍만과 윤동식조차 받아야 할 돈 수억 원을 못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에서 열린 K-1 MAX 대회에서도 체불 사례가 잦았다. 지난해 버질 칼라코다와 싸웠던 김세기 측은 지급을 미루겠다는 주최 측에 소송을 걸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야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올 3월 대회에서도 여러 선수가 5월 말까지 지급 받기로 한 대전료를 아직 받지 못했다. 주최 측은 이달 중으로는 해결해 주겠다며 지급 시기를 미루고 있는 상태다.
지인진은 향후 이런 피해를막기 위해서라도 맞서 싸울 결심이다.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소송 준비를 면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싸움이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면서 “K-1에선 내가 여느 선수들처럼 제풀에 지쳐 떨어지길 바라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지인진은 소송 문제와 별도로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도 한창이다. 이미 올 초 자신의 이름을 딴 복싱체육관을 개관, 운영하고 있는 지인진은 최용수와 함께 프로복싱으로 돌아가 현역 선수 활동을 속개할 계획이다. 권투협회 등에서도 이들의 복귀를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조용직 헤럴드경제 온라인뉴스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