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성 위궤양은 세균 ‘헬리코박터’(원안)의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좀처럼 치료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그러나 1979년 호주의 병리학자 워렌이 위 점막에서 최초로 살아있는 세균을 발견했고, 1989년 오랫동안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이 균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그후 헬리코박터의 위해성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했으며, 전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 균에 감염돼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습관적인 위염 위궤양에 헬리코박터가 관련돼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하지만 헬리코박터의 유해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벽히 치료해야 하는가에 있어서는 아직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돼있지 않다.
특정 질병으로 이어지지 않은 단순 감염까지 치료하자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 또 헬리코박터를 잡기 위해 항생제를 사용하는 경우 항생제 내성이 생겨 다른 질환에 대한 치료가 어려워진다는 것도 반대의견의 주 이유다. 헬리코박터의 정체와 치료법을 알아봤다.
우리가 흔히 헬리코박터라 부르는 위장속 세균의 정식 명칭은 ‘헬리코박터 파이로리’. 위의 날문(파이로리; 위의 윗부분)에 사는 나선형(헬리코)의 균(박테리아)이란 뜻이다. 길이는 육안으로 볼수 없는 2∼7㎛ 정도인데, 다른 균과 달리 한쪽 끝에 서너개의 편모를 가지고 있다. 이 편모는 위벽의 점액 단백질인 ‘뮤신층’을 뚫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그 때문에 다른 대장균에 비해 20배나 운동성이 높고 치료제를 복용해도 이 편모를 이용해 위점액층으로 뚫고 들어가 숨는 경우가 많다.
헬리코박터의 생존력은 천하무적에 가깝다. 위장에 들어오는 질긴 고깃덩어리도 모두 녹여내는 위산을 뒤집어 쓰고도 끄떡없다. 위산으로 인해 위 자체까지도 헐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헬리코박터는 건재하다.
헬리코박터의 이러한 생존 비결은 오랫동안 과학자들의 숙제였으나 2001년 국내 연구진(포항공대 오병하 교수)에 의해 의문이 풀렸다. 비밀은 헬리코박터가 지니고 있는 단백질에 있었다.
헬리코박터의 몸 안에는 유리에이즈(단백질의 일종)라는 물질이 있다. 유리에이즈는 암모니아를 만드는 재료인데 알칼리성인 이 암모니아가 위산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 위산이 폭포처럼 쏟아질 때 헬리코박터는 재빨리 유리에이즈를 뒤집어쓰고 살아남는다.
헌데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유리에이즈를 스스로 꺼낼 수는 없다. 대신 위산을 먼저 뒤집어 쓴 균들이 죽어가면서 유리에이즈를 내뿜어 남아있는 균들의 몸에 뿌려준다. 먼저 희생된 세균들의 유산으로 남은 동료들은 목숨을 건지는 것이 헬리코박터의 생존법이다.
그렇다면 위산이 쏟아질 때마다 헬리코박터의 개체수는 계속해 줄어들지 않을까. 그러나 순간적으로 개체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산이 멈추고 몇 시간만 지나면 헬리코박터는 순식간에 다시 증식해 원래 숫자만큼 늘어난다. 헬리코박터의 박멸이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헬리코박터의 유해성이 규명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1994년 2월, 미국의 한 연구진은 최초로 헬리코박터가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등의 소화성 궤양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특히 십이지장궤양 환자의 90%가 헬리코박터에 감염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헬리코박터 감염이 반드시 소화성 궤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헬리코박터를 제거하면 궤양 발생률은 현저히 감소했으며 재발률 또한 크게 낮아졌다. 헬리코박터를 놓아두고 궤양만 치료하는 경우 재발률은 60∼80%에 이르지만 헬리코박터를 함께 구제했을 때는 5% 이하로 낮아졌다.
헬리코박터 감염률은 후진국일수록 높다. 그런데 한국 성인의 감염률은 50∼60%로 세계 최고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한국인에게 위장병이 특히 많은 것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한국인의 감염률이 매우 높은 것은 식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그릇에 여러 사람이 숟가락을 같이 넣는 찌개문화, 술잔 돌리기, 부모들이 자신의 수저로 아이에게 음식을 떠먹이고 심지어 씹어서까지 먹이는 육아습관 등 한국인만의 전형적인 식습관이 감염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역류되는 위액을 타고 올라온 헬리코박터가 타액과 치아 등 입 속에 있다가 술잔, 수저를 통해 타인의 입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헬리코박터가 입까지 올라와 있을 경우 키스만으로도 감염이 된다. 헬리코박터를 치료해도 재감염률이 12∼15%에 이르는 것 역시 이러한 식습관과 관련이 있다. 대변에서 나온 균이 물과 야채를 통해 감염되는 비율도 높다.
헬리코박터에 감염되었다 해도 그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없다. 또한 당장 특정 질병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감염자들은 자신의 감염 사실을 모른 채 잘 살아간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헬리코박터 감염자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감염자 중 어떤 사람을 치료 대상으로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은 아직은 분분하다. 현재로서는 특별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한 굳이 걱정하거나 애써 치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대세다.
가톨릭의대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모든 사람이 헬리코박터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다. 감염되었다고 해도 반드시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우선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감염자인 상황에서 감염자 모두가 당장 치료를 받는다면 그 비용과 시간, 노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모된다.
헬리코박터 멸균 약물을 복용했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도 문제다.
정 교수는 헬리코박터를 퇴치하기 위해 멸균약물(항생제 포함)을 복용하는 경우 몸속 균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갖게 되므로 그 후에 다른 질환이 생겨 항생제를 써야 할 때 치료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멸균 약물을 복용한 사람들에게서 역류성 식도염이나 위와 식도가 접합하는 부위에서 생기는 암의 발병률이 더 높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며 헬리코박터 퇴치에 따르는 어려움을 설명했다.
헬리코박터를 없앴다고 해서 위암 발병률이 반드시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헬리코박터가 위암 발병과 관계가 깊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입증되었으나 정확히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 발병기전이 아직 밝혀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정인식 교수는 “현재로서는 헬리코박터를 없앰으로써 위암 발병률이 낮아졌다는 어떤 조사결과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헬리코박터 치료를 할 필요가 없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98년 2월 소화기내과 의사들이 협의를 거쳐 헬리코박터균 치료가 필요한 대상자의 기준을 정해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인 감염자가 모두 치료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심한 위장질환을 갖고 있는 감염자라면 헬리코박터에 대한 직접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된 모든 궤양 환자 ▲위에 악성 림프종이 생긴 환자(위 림프종 환자 중 92∼100%가 헬리코박터에 감염돼 있으며 헬리코박터를 제거하면 림프종도 사라짐) ▲조기 위암으로 위암 절제수술을 받은 환자(헬리코박터를 제거하면 암 재발률을 낮출 수 있다는 보고가 있음) ▲장기간 진통제를 복용해야 하는 환자 ▲소화불량 환자 중 혈액검사에서 헬리코박터 항체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 등이다.
위에 만성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헬리코박터 감염 여부를 검사받기 위해서는 우선 소화기내과를 찾아가면 된다. 검사방법은 3가지다.
첫째 내시경을 통해 위점막의 일부 조직을 떼어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방법. 다소 부담스러운 방법이지만 동네 의원에서도 가능하며 비용도 저렴하다.
둘째는 혈액검사. 피를 뽑아 헬리코박터 항체가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으로 역시 동네의원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감염 여부는 확인할 수 있어도 치료 후 균이 완전히 박멸됐는지 최종 확인하는 검사로는 적합하지 않다.
세번째는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요소호기법이 있다. 동위원소인 C13이 결합된 요소를 들이마신 후 음주측정하듯 숨을 뱉어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
간편하고 정확도도 높아 미국 FDA가 권고하는 방법이며 주로 대형 병원에 시설이 갖춰져 있다. 비용은 4만원선.
헬리코박터 감염 여부가 확인 후 치료 권고를 받는다면 보통 항생제를 중심으로 제균제를 쓰게 된다. 한 가지 약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아 대개 몇 종류를 섞어 쓴다. 항생제의 부작용으로 대장염이 생긴다거나 약물에 따라 설사나 흑색변, 알레르기반응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2주 후면 90% 이상 완치된다. 아직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
치료 후에는 재감염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감염되면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처음보다 치료가 어려울 수 있다.
헬리코박터 증식을 억제할 수 있는 식품도 있다. 유산균의 일종인 락토바실러스균이나 계란 노른자, 차조기잎 등이 대표적인데, 헬리코박터균을 완전히 없애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식품에는 헬리코박터 증식을 억제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 윤은영 건강정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