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팀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부부 사이 폭력의 배경에는 남성의 권위주의와 의처증(의부증 포함)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남편의 심한 구타 때문에 보호시설 등으로 피신하는 여성의 상당수는 가정폭력의 원인으로 남편의 질투와 의처증을 꼽고 있다.
의처증과 의부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무엇이 이들을 병적인 의심에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그 의심에는 과연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효과적인 치료법은 무엇인가를 알아봤다.
▲ 의처증은 논리적인 설득을 할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반발 만 낳기 때문에 가족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는다. 사진은 최민식 전도연 주연의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 ||
학계는 아직 의처증과 가정폭력 사이의 연관성을 놓고 연구자들의 입장이 크게 갈려있는 상황이지만 현장 중심의 사례분석에서는 그 연관성이 높은 비율로 입증되고 있다.
가정폭력 문제를 주로 연구하며 상담활동을 해온 연세대 사회복지연구소 이서원 연구원은 “주먹질이나 야구방망이 같이 흉기를 사용한 심한 폭력은 단순한 부부관계의 문제라기보다는 가해자 개인의 성격적 특성 때문에 일어난다”며 “심한 폭력의 상당수가 의처증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의처증과 의부증은 논리나 정황, 진실과 관계없이 한쪽이 배우자의 부정을 굳게 믿으면서 생긴다. 한번 생긴 의심은 이내 확신으로 굳어져 아무리 정황을 해명하고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도 해소되지 않는다. 때문에 의처증은 ‘망상장애’라는 정신적 질환으로 구분되고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광일 원장은 “망상장애란 말 그대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득해도 전혀 변하지 않는 잘못된 확신”이라며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도 자신의 오해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더 화를 낼 뿐 아니라 나중에는 설득하는 사람까지 의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의심받는 배우자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더 더욱 소용이 없다. 오히려 환자들은 자기 망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도청, 미행, 협박, 폭력, 비디오 촬영, 몸 검사 등 비정상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망상’이란 증상은 일반적인 정신분열 우울증 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 편집형 인격장애, 알코올중독 등 약물로 인한 기질성 정신장애, 뇌손상 등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러나 의처증 의부증은 그 자체가 ‘망상장애’로, 다른 정신장애처럼 쉽게 식별이 되지 않다. 배우자를 의심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정신적 문제를 거의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평소 다른 면에서는 아주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사회생활도 적절히 잘 하는 경우가 많다. 성취에 대한 욕망이 남달리 강한 경우도 있어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능력을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까운 친척들조차 환자가 자신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다”는 식으로 변명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일쑤다. 주변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감싸기 쉽고, 폭력 등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의심받는 배우자 쪽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우도 많다.
억울한 것은 피해당사자인 배우자들이다. 삼자의 오해까지 겹치면서 이들이 받는 고통은 이중삼중으로 커진다. 남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냉가슴 앓다가 상황이 매우 심각해져서야 구출을 호소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밖에 알리게 된다.
예전에는 의처증 의부증 같은 망상장애를 ‘오델로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오델로>에서 오델로가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델로>의 경우처럼 열등감은 망상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열등감까지 겹쳐 자존심의 손상이 깊을 때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배우자에 대한 의심이 생겨난다.
이서원씨는 “거의 모든 의처증은 아내가 정말로 부정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남편의 내면적 문제가 원인”이라며 “의처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의 상당수가 사실은 자신이 부족해서 아내가 떠나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말한다. 남편이 성적인 열등감이나 자신감의 부족에서 아내를 의심하고 화를 폭발시키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는 설명.
여러 조사에서 나이 수입 학력 등 외형적 조건이 아내보다 낮은 남편에게서 폭력 발생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통계적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성격적인 특성도 원인일 수 있다. 망상장애에 사로잡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집착이 강한 편집증적 성격, 어렸을 때부터 무척 까다롭고 무슨 일이든 그냥 넘기지 못하고 곰곰히 생각하는 습관, 지나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아 세세한 일까지 기억하고 작은 실수나 남이 한 행동을 절대로 잊지 못하는 성격의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의부증이 있는 여자들은 의존적이고 미숙해서 배우자가 옆에 있어야만 안심하는 성격인 경우가 많다. 독점욕이나 시샘이 많은 사람도 의부증이 될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들은 비밀을 털어놓고 지내거나 의견을 나눌 친구도 없는 경우가 많다.
망상장애는 성장과정의 문제가 원인일 수도 있다. 김광일 원장은 “성장하는 동안 부모와의 관계에서 신뢰의 결여를 겪은 아이들은 뒤에까지도 언제나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되며 주위 환경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인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부모가 알코올중독이나 편집증이 있는 경우, 구박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도 망상장애를 겪을 수 있다.
해외 이민 등으로 고독하고 고립된 감정에 경제난, 기타 스트레스들이 겹쳐 망상장애의 기질이 나타나게 되는 수도 있다. 이 경우 고향으로 돌아가면 대개는 치유되지만, 치료하지 않고 있으면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의처증 의부증은 발견하기도 힘들지만 치료받기는 더욱 힘들다. 특히 의처증의 경우 현실적으로 아내가 남편을 병원으로 데려오는 것부터가 어렵다.
김 원장은 “상담은 많지만 치료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문 게 현실”이라며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통원치료보다 입원치료가 많은데 약 2∼3개월이면 호전된다”고 말했다.
의처증 의부증은 배우자만의 노력으로 해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번 발생한 망상이 절로 사라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비위를 맞추거나 무조건 참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사회적인 위신이나 자녀와의 관계 등을 이유로 배우자가 무작정 참고 견디는 경우가 많은데, 그대로 가면 피해자 자신의 고통은 물론 환자의 병도 더욱 나빠지기만 한다.
의처증 의부증은 실제 정신과 임상현장에서도 치료가 힘든 병으로 분류되고 있다. 우선 자신의 병에 대한 인식이 없을 뿐 아니라 병의 특성상 치료자와 신뢰관계를 쌓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환자는 치료자와 자기 배우자와의 관계까지 의심하며, 심지어 자신의 직계 가족까지 한통속이라고 생각하여 가족간에 분란이 생기기도 한다. 때문에 보통 가족치료가 함께 시행되며 특히 부부치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병원 치료는 망상장애에 대하여 대개 향정신성 약물을 처방하게 된다. 핵심적인 망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초조감과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결과적으로 증상 개선에 도움을 준다.
최근의 치료방향은 환자의 배우자에 대한 의심을 덜어주는 것보다는, 환자 자신이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게 하는 상담치료에 초점을 맞춰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비슷한 문제를 가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는 집단치료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시켜 보면서 많은 교정효과를 얻을 수 있다.
폭력을 동반하는 의처증을 치료할 때 부부를 함께 앉혀놓고 치료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치료 도중 부부관계가 더 악화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법으로 금지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윤은영 건강정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