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병으로 가슴에 답답한 기운이 뭉친 환자를 경희대 한방병원 화병클리닉 김종우 교수가 침을 꽂아 치료 하고 있다. | ||
이런 화(火)를 제때 풀지 못해 가슴속에 쌓이고 쌓이면 병이 된다. 울화란 억울한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억지로 참는 가운데 생기는 신경증적인 화. 이 울화가 원인이 되어 생기는 병이 화병(火病)이다.
특정 부위에서 이상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정신적, 신체적인 증상의 원인이 된다. 정신병과 달리 극심한 인격의 변화는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한국인에게는 유독 많은 한국적 질병으로 세계백과사전에도 한국어 발음대로 등록된 질병이다.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참는 것을 강요당하며 살아온 한국의 중년 이후 여성에게 가장 많지만, 최근에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나 극심한 취업난으로 화병을 호소하는 젊은 사람에서부터 정년퇴직 후 집안에 있다 보니 화병이 생겼다고 하는 노인까지 환자 유형이 매우 다양해졌다”고 경희의료원 한방병원 화병클리닉 김종우 교수는 설명한다.
일시적인 스트레스나 충격만으로는 화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병에 걸릴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그로 인한 압박을 느끼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화병에 노출되기 쉽다. 경제사정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 외에 사업 실패, 생활고, 가정불화 등 직접적인 울화와 스트레스가 가해질 때 그 위험은 더욱 높아진다.
유일하게 우리나라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해서 한국의 문화 관련 증후군으로 불리는 화병. 이는 정신적 질병인 우울증과 달리 스트레스의 원인을 알면서도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쌓아두는 것이 주로 문제가 되어 생긴다.
대표적인 증상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막히는 증상, 얼굴이나 몸에 무엇인가 확 치밀어 오르는 듯한 증상, 급작스러운 화의 폭발 혹은 분노이다. 이 중 한 가지 이상의 증상이 지난 6개월 동안 뚜렷하게 나타났다면 화병이 의심된다.
김종우 교수는 “화는 오행 중에서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화병이 있으면 얼굴이나 가슴의 열기, 분노, 충혈 등의 증상을 보인다. 또 불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주로 가슴 이상의 부위에서 두통 어지럼증 상열감, 그리고 가슴의 답답증이나 열기가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고 설명한다.
가슴의 한가운데를 지그시 눌렀을 때 심한 통증이 느껴져도 화병을 의심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가슴의 정중앙은 ‘전중’이라는 침 자리로, 화병을 진단하고 경과를 관찰할 때 살펴보는 부분이다. 전중을 눌러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우다. 치료로 증상이 좋아지면 통증이 완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손쉽게 화병을 자가 체크해보는 방법도 있다. 최근 김종우 교수와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정신과 이민수 교수, 고려대 심리학과 권정혜 박동건 교수팀이 공동 개발한 ‘화병진단 표준 면접지’를 이용하면 나에게도 화병 증상이 있는지 어느 정도 진단이 가능하다.
화병의 가장 흔한 원인은 가족관계로 인한 것이다. 피하기 어려운 기본적인 인간관계인 만큼 같은 유형의 스트레스를 매일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서 큰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가족관계라고 해서 예전처럼 고부갈등이나 배우자 외도만 생각하기 쉽지만, 자녀문제나 시험실패, 갑작스러운 가족의 사망 등 여러 가지가 원인이 되고 있다.
직장에서의 갈등도 중요한 원인. 과도한 업무나 불만족스러운 업무 내용, 또는 상하 위계질서가 엄격해 억울한 감정을 터놓고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일수록 위험요소가 크다.
경제적 스트레스도 직접 원인으로 가세하고 있다. 생활고와 이로 인한 가정불화, 사업 실패, 이외에도 심한 취업 스트레스 등이다. 이밖에 일반적인 사회관계에서도 화병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스트레스 환경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고 6개월 이상 화가 쌓이면 화병이 된다.
물론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도 이에 대처하는 자세, 개인의 성격 특성에 따라 화병에 걸릴 위험도는 크게 차이가 있다.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정신과 이민수 교수는 “지속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면서 화병에 잘 걸리는 성격에 속하고, 화병으로 의심할 수 있는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미리 전문의의 도움을 받는 것이 화병을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화병이 있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나치게 분비는 만큼 건강에도 적신호가 된다.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져 고혈압이나 당뇨, 심장병, 뇌졸중 등의 성인병에 걸리는 위험이 높아지기 마련.
뇌졸중 환자와 화병의 유병률을 조사한 국내의 한 연구(1998)에 따르면, 중풍환자가 예전에 앓고 있는 질환을 조사했더니 고혈압(53.0%) 다음으로 많은 것이 화병(28.5%)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화병은 크게 분노기-갈등기-체념기-증상기라는 4단계의 과정을 거쳐 증상이 나타난다.
큰 스트레스를 받아 화가 몹시 나는 시기가 분노기. 물론 순간적인 분노의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스트레스, 화를 계속해서 받게 되면 어떻게 대처하느냐를 놓고 갈등하는 갈등기가 이어진다. 화를 참아야 하나, 참지 말아야 하나? 회사를 그만둘까, 꾹 참고 다닐까? 이혼을 할까, 참고 살까? 등 갈등을 겪으면서 심각한 불안을 겪는 시기다.
갈등기가 길어져 오래 참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싸움을 포기하고 전신의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체념기가 찾아온다. 모든 게 자신의 탓으로 생각되어 노력할 생각조차 못하는 시기이다.
체념기 후에는 드디어 정신적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한 우울감이나 무력감, 화의 폭발 같은 증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증상이 다양하다 보니 화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이상이 없는 신경성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얼굴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리는 증상을 호소하면 산부인과에서는 갱년기 장애라는 진단을 내린다.
화병의 치료는 화병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없애면서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환경을 어떻게 개선하느냐 하는 것이 화병 치료의 관건이다.
“화병 환자가 흔히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는 것은 기가 뭉쳐있는 것으로, 이때는 가슴의 뭉친 기를 풀어주어야 한다. 기의 순환에 이상이 생겨 얼굴로 열이 치솟는 때는 열을 가라앉히는 치료가 필요하다.” 김종우 교수의 설명이다.
가슴에 뭉친 기운을 풀어주는 데는 침이, 지속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열을 내려주는 데는 한약이 효과적이다. 주로 열을 떨어뜨리는 황련·목단피 등의 청열약, 길경·행인 등 기의 순환을 도와주는 이기약, 당귀·숙지황·구기자 등 화의 억제를 위해 수를 도와주는 자음약, 모려·산조인 등이 많이 처방된다고 한다.
양방에서는 부부치료, 가족치료를 포함한 정신과적 치료를 위주로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항우울제 등 약물치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