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많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건 살인 폭력 등 사회 사건의 발생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살인’에 의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IMF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화를 내는 건 마음이지만, 그것은 직접 몸에 반응을 일으키며 또 몸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화는 심장병 뇌졸중 고혈압 등 심혈관계 질병을 부추기고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신체 면역기능을 떨어뜨린다. 화를 오래 참은 사람은 암에 걸리는 빈도도 높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면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동생들은 공부를 하지 못하고 혼자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H씨는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어렵게 사는 동생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을 안고 살아왔다. 40대에 이르도록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 승진을 거듭했지만 요즘 와서는 업무의 부담이 늘고 있다. 일에 대한 책임은 갈수록 커지는 데다 컴퓨터, 영어 등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하느라 남모르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 요즘은 젊은 신입 사원들조차 예전 후배들처럼 말을 잘 따르지 않아 스트레스가 크다. 이미 후배들에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가 불안감마저 생긴다. 갈수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급기야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잠조차 못 이루는 밤이 늘어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유없이 불안하며 답답한 증상이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지속되고 있다. 자꾸 한숨이 나오고 두통도 잦다.
당장 몸에 나타나는 불안증 때문에 병원을 찾은 H씨. 의사와의 상담 결과 화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급격한 사회변화와 직업 붕괴 등의 영향으로 젊은 나이에 화병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예전에는 화병 하면 50대 이후에나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30~40대 젊은 층의 환자도 많아졌다”고 경희대 한방병원 화병클리닉 김종우 교수는 말한다.
전통적으로 화병은 화를 풀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두는 경우가 많은 여성에게 더 많은 편. 그러나 요즘은 남성들의 화병도 눈에 띄게 늘었다. 김종우 교수는 “오랜 기간 화를 참고 참다 생기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은 경기침체와 직장에서의 승진이나 대인관계 등 갈등으로 짧은 기간에 화병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영업을 하는 S씨(37)는 경기가 안좋아 일감이 크게 줄면서 걱정을 많이 하다가 화병을 얻었다. 일감이 몇 달쯤 끊겼다가 다시 생겼는데, 예전에는 쉽게 되던 일조차 잘 되지 않자 답답하고 불안해졌던 것. 고민을 할수록 자주 열이 치밀어오르는 느낌도 나타났다.
화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분한 일이 있을 때 화를 내는 것은 가슴에 맺힌 감정을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의 효과로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유익한 현상이다. 그러나 화를 너무 잘 내는 경우, 한번 화가 나면 스스로 주체할 수가 없는 경우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심각성을 눈치채기 어렵지만, 화병은 위험할 수 있다. 일단 화병 환자들은 울분이 쌓여 사는 재미가 없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서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뭐든 걸리면 아주 끝장을 내려고 덤벼들어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들고 대인관계를 망쳐버리는 일이 잦다. 심지어는 가족들과의 사이마저 어려워져 화병 환자가 있으면 모든 가족이 행복할 수 없다.
상지대 한방병원 사상체질의학과 김달래 교수는 “화가 계속 쌓이면 결국 몸 안 어디엔가 그 기운이 뭉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화를 너무 자주 내면 지나친 긴장이 혈압, 맥박에 나쁜 영향을 미쳐 고혈압, 뇌혈관 질환을 만들거나 심장에 부담을 줘 협심증의 위험을 높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화병이 생기면 심장의 부담이 극심해져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국내 대학병원의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반대로 화를 너무 잘 참는 것도 문제. 스트레스는 대부분의 암에 영향을 미치는 발암요인이 된다. 하버드대의 한 연구보고서는 “분노를 어느 정도 표출하는 사람은 무조건 참는 사람보다 심장마비 위험이 50% 이상 줄어들고, 뇌졸중 발생률도 낮다”고 밝힌 바 있다.
한방의 사상체질의학에서는 소양인에게 화가 가장 잘 쌓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건강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지만 음기가 부족한 소양인은 사소한 일이나 부담에도 곧잘 스트레스를 받는다. 소양인의 화를 푸는 데는 시원한 얼음물이나 구기자차 녹차 복분자차 등 음료, 상추 참외 오이 박나물 새우 게 미역 다시마 등의 식품이 좋다. 운동으로는 산책(특히 해변), 천천히 자전거타기, 골프 등이 권할 만하다.
만약 얼굴에 열이 잘 오르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거나 큰 소리로 웃도록 노력하면 화가 잘 내려간다.
이와 달리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삭이기를 좋아하는 소음인도 화병에 걸리기 쉬운 체질. 잘못이 명백하게 다른 사람에게 있을 때는 참지 말고 이야기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언쟁이 될 수도 있겠지만 화를 제때 풀도록 노력해야 건강에 좋다. 소음인의 화병에는 따뜻한 생강차 인삼차 대추차 감초차 등 차 종류나 카레 감자 파 양파 마늘 찹쌀 고추 등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식품이 효과적이다. 운동은 달리기 등산 아령 등이 알맞다.
화병의 조짐이 있다면 우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천천히 호흡하는 훈련을 한다. 호흡을 억지로 천천히 하면 머리가 아프거나 눈이 불편할 수 있으므로 무리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는 것이 요령이다.
만약 긴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화병이 심하다면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거나 일정한 리듬에 맞춰 기도문이나 주문을 외우는 것도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를 시조처럼 읊거나 염불투의 주문 등 마음대로 하면 된다. 호흡법을 익혀서 손발이 따뜻해지거나 손바닥 발바닥이 촉촉해지면 몸의 기운이 정상적으로 순환하게 된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울분이나 주위 사람에 대한 불만을 삭이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매사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마음을 넓고 크게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화병 증상이 심하다 싶을 때는 전문클리닉을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치료시기를 늦출수록 다른 질병으로 발전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방에서는 침과 열을 내리는 한약치료로 증상을 먼저 없앤다. 아로마요법, 명상 등도 치료에 흔히 응용된다.
증상을 가라앉힌 뒤에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선 자신이 너무 쉽게 화를 내지는 않는지, 쉽게 다스릴 수 있는 화인지 아닌지를 균형있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자기통제 능력을 키우는 데는 운동으로 몸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다. 걷기부터 시작해 기초 체력을 기른 다음 뭔가 자기에게 알맞는 운동을 배우는 것도 요령. 취미도 마찬가지로 손쉬운 것부터 시작해 차츰 전문성있는 것으로 바꾸면 좋다.
양방에서는 화병을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신체화 장애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을지대학병원 정신과 유제춘 교수는 “화병 증상으로 일상생활에 장애를 느낄 정도라면 증상에 맞는 항우울제 등의 약으로 증상을 줄이면서 심리치료를 시도한다.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 화병의 원인 등을 정확하게 파악해 해결 방법을 찾는다”고 치료 방법을 설명한다.
적극적인 운동이나 노래부르기 등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취미생활도 많은 도움이 된다.
다른 병도 마찬가지이지만 화병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바로 예방.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노력하면 절대 화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과장이 심하거나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을 대할 때는 그냥 들어주고,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라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선에서 명확하게 “NO”라는 의사표현을 할수 있어야 한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