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의 현실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8·9전당대회에서 당선된 지 정확히 열흘이 되는 8월 18일 이 대표와 정 원내대표는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한 비박계 중진 의원은 “언론 속성을 잘 아는 둘의 언론플레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입’과 같은 존재로 대변인 역할을 하며 대언론 창구로 맡아왔고, 정 원내대표는 본인이 신문기자 출신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 이 대표는 전당대회 다음날인 10일 취임 일성으로 ‘봉숭아학당’ 이미지를 벗겠다며 최고위원들의 모두발언 공개를 전면 차단했다. 조율되지 않은 개개인의 견해가 마찰을 빚어 집권여당 난맥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지난 지도부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는 계산에서였다. 실제 이날 이 대표는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마이크를 끄고 “자 그럼 지금부터 비공개…”라고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갑자기 정진석 원내대표가 ‘원내 현안’이라며 마이크를 켜고 모두발언을 시작했다.
“국회 예산결산특위의 추가경정예산 심사가 중단됐다. 22일까지 11조 원 규모의 예산안을 심의하기에는 시간 매우 촉박하다. 추경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야당은 국민 앞에서 서명한 합의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추경 처리를 두고 발목은 물론 손목도 잡고 있다. 추경과 분리한 ‘따로국밥’ 청문회에 합의해 놓고 어떻게 갑자기 ‘짬뽕 청문회’를 하자고 우길 수 있는 것인가.”
이 대표는 정면을 응시하며 정 원내대표의 일장 연설을 들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로부터 11시간 뒤 정 원내대표의 도발 아닌 도발이 이어졌다. 정 원내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은 이랬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직권남용과 횡령 혐의로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검찰이 현직 민정수석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면서 “특별감찰관의 수사의뢰가 제기된 상황에서 (우 수석이) 직책을 계속한다는 것은 법리상, 국민정서상 불가하다. 우 수석은 대통령과 정부에 주는 부담감을 고려해 자연인 상태에서 자신의 결백을 다투는 것이 옳다. 우 수석이 결심해야 할 시점이다.” 정 원내대표는 기자들과의 통화에서 “원내사령탑으로 논평을 한 것”이라고 했다.
정 원내대표의 페이스북 글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주장이 이 대표와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우 수석의 경질 내용이 빠진 8·16 개각에 대해 “이번 인사는 하나는 안정, 하나는 쇄신”이라며 “처음부터 같이 해오면서 너무 지치고 피곤한 장관들을 교체를 해주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우 수석이 빠진 것을 두고선 “대통령의 권한”이라고 했다.
정 원내대표가 페이스북 글을 올리기 직전 김현아 당 대변인은 “정치적 중립의무가 있고 누구보다도 엄정하게 실정법을 준수해야 할 특별감찰관이 사전 기밀누설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우 수석을 (검찰에) 수사의뢰한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며 “특별감찰활동의 활동내역이 사전에 공개되는 것은 사실상 국가원수의 국정수행을 마비시킬 수 있는 국기 문란행위”라고 논평했다. 우 수석 거취를 말한 당 대표 산하 대변인과 원내대표의 표현이 정반대다. 이를 두고 여권 한 관계자는 “‘이(정현)-정(진석) 대립’은 이제 시작”이라며 “주도권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고 관측했다.
새누리당 원내지도부 핵심 관계자는 “이 대표 취임 전까지 사실상 당을 통솔한 정 원내대표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대상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이 대표도 정 원내대표에게 ‘대야 창구’ 정도의 역할만 부여하고 있다. 친박 핵심인 이 대표와 친박으로부터 천대 받은 ‘낀박’ 정 원내대표의 기싸움은 사실 이 대표 취임 직후부터 적잖게 발발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 10일 일부 핵심 당직자들이 이 대표에게 ‘전기료 누진제 개편’과 관련된 행사를 첫 공식일정으로 제안했다. 당시는 산업부가 누진제 개편은 부자 감세라는 논리로 반발하던 때였다. 이 대표도 당 사무처의 이런 제안을 두고 ‘누진제를 손 볼 수 없다’는 정부 기조에 반해선 안 된다며 전기료 행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정 원내대표가 국민적 관심이 전기료인데 이를 집권여당이 외면해선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는 것이 흘러나오는 얘기다. 한 당직자는 “그래도 정책은 조율이 되지만 친박이냐 비박이냐 하는 계파 얘기로 번지면 둘의 전쟁은 ‘죽고 사는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고 했다.
이 대표와 정 원내대표는 여러모로 닮았다. 웅변이 강하다. 욱 하는 성격이 있다. 멘토(박근혜 대 김종필)가 분명하다. 콘텐츠에는 약하나 임기응변식 대처능력은 강하다. 인연도 깊다. 이 대표는 이명박 정부였던 2010년 차기 유력 주자였던 박근혜 의원의 대변인이었고, 정 원내대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아래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세종시 문제로 이 전 대통령과 박근혜 당시 의원이 갈등을 빚을 때 둘은 중재에 나섰고 면담을 성사시켰다. 회동 후 정 원내대표는 청와대에서, 이 대표는 국회에서 각각 브리핑했다.
당장 이 대표의 인선이 투톱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탕평인사, 능력인사, 소수자 배려인사’를 인사 기준으로 제시한 이 대표가 만약 지명직 최고위원, 사무총장단, 여의도연구원장, 인재영입위원장, 당무감사위원장 등에 친박 인사를 기용할 땐 정 원내대표가 칼을 꺼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선출된 당 대표와 함께 환상의 찰떡 공조를 이루겠다”고 약속한 정 원내대표지만 ‘계파 행보’만큼은 뿌리 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박혀 있다는 전언이다.
이 대표는 “대통령과 맞서고 정부와 맞서는 것이 정의인 양 하는 사람이 있다. 여당 의원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 다분히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겨눴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 전 원내대표의 복당에 정 원내대표가 가장 앞장섰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친박계로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정 원내대표가 해낸 셈이다.
이 대표가 주재한 지난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선 중진 참석자 21명 중 8명만이 참석했다. 3선 당 대표 밑에 설 수 없다는 다선 중진 의원들의 무언의 항변이었다는 말이 있다. 윗물에선 이 대표 체제의 정당성과 정통성이 그만큼 약하다는 얘기다. 당 대표가 궐위하면 원내대표가 그 직을 대행하게 된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