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 돌고 있는 혈액형 건강법에 대해 전문의들은 “해롭다는 근거도 이롭다는 근거도 없다”고 말한다. 사진은 헌혈 모습. | ||
사람들은 혈액형에 관한 많은 속설에 집착한다. 인터넷 검색어에 혈액형이라는 단어를 한 번만 쳐보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혈액형과 성격, 혈액형과 인간관계, 혈액형과 연애궁합, 혈액형과 사회적 능력 등에 관한 이야기는 비교적 고전적인 속설에 속하고 요즘 유행하는 혈액형과 과일, 채소궁합은 새로 등장한 속설 중 하나다.
이에 따르면 A형은 위장기능이 약해 카로틴 성분이 많은 당근, 과일 중에는 위암 예방 효과가 있는 키위가 좋다고 한다. 또 신장기능이 약한 B형은 양배추, 방울토마토와 궁합이 맞고, 면역체계가 약한 타입인 O형은 평소 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브로콜리가, 간기능이 약한 AB형이라면 치커리, 케일 같은 녹색 채소와 함께 오렌지가 특히 좋다는 내용이다.
한 대형마트가 내놓은 혈액형별 샐러드의 경우 A형 샐러드에는 양상추 치커리 당근 적채 키위 양파가 들어가고, B형 샐러드에는 양배추 치커리 샐러리 방울토마토 오이를 넣었다. O형 샐러드에는 양상추 치커리 브로콜리 건포도 적채가, AB형 샐러드에는 양상추 치커리 쌈케일 적근대 오이 적채 오렌지 당근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혈액형별 과일·채소궁합론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요즘 이야기하는 혈액형별 과일·채소궁합은 미국의 자연요법 전문가인 피터 J. 다다모 박사가 제안한 ‘혈액형 다이어트’에 관한 내용과 비슷하다. 국내에서는 이미 몇 년 전에 소개돼 많은 관심을 끌었다. 혈액형별로 맞는 음식을 먹어야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 다이어트 효과도 크다는 것이 그의 주장.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가 렉틴이라는 단백질에 관한 이론이다. 다다모 박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식품에 들어있는 렉틴 단백질은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체내에 남아 대사를 방해하는데, 이 렉틴에 대한 반응이 혈액형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즉 다이어트를 돕거나 방해하는 식품도 혈액형별로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B형은 면역력과 소화능력이 모두 뛰어나지만 렉틴이 많은 밀가루, 옥수수, 땅콩, 들깨 등의 식품을 많이 먹으면 렉틴으로 인해 신진대사율이 떨어진다. 그래서 몸을 따뜻하게 해서 신진대사를 돕는 생강, 고추 등의 식품과 궁합이 맞는다고 한다.
하지만 다다모 박사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많다. 서울아산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권석운 교수는 “렉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해도 음식물을 통해 섭취된 렉틴이 소화되는 과정에서 모두 분해되는 것은 확실하다”며 “혈액 속으로 흡수되는 것은 렉틴 단백질이 소화되어 분해된 산물이지 렉틴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렉틴 자체가 장에서 반응해 병을 일으키고, 혈액 속으로 들어가서 적혈구를 응집시키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권석운 교수는 요즘 유행하는 혈액형별 과일·채소궁합에 관해서도 “그것이 특별히 해롭다는 근거도 없지만 이롭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없다”며 “특히 다이어트 등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부작용이 생길 여지도 있으므로 삼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혈액형과 질병과의 관계는 어떨까. 의학적으로 혈액형과 질병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아직 밝혀진 부분은 적지만 부분적이나마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연구결과가 여러 편 나와 있다.
1980년대 후반의 한 연구에 따르면 O형은 콜레라에 잘 걸리는 데 반해 AB형은 저항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AB형의 경우 콜레라 세균이 든 물을 먹어도 쉽사리 설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O형은 말라리아, 여러 종류의 암에는 적게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혈액형에 따라 혈액 속의 혈액응고인자의 함유량이 다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A형은 O형보다 혈액응고인자를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 관상동맥이 막힐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이다. 국내의 한 조사에서도 이런 연관성 때문인지 A형의 관상동맥질환 발생률이 다른 혈액형보다 높게 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서울아산병원 혈액은행이 1만 1000여 명 환자의 혈액형과 질병 종류를 분류해 분석한 결과 A형에서는 위암과 류머티즘관절염, 관상동맥질환이 특히 많고, B형은 유방암과 당뇨병, O형은 십이지장궤양, AB형에서는 패혈증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처럼 혈액형이 단순히 수혈이나 장기이식 등을 할 때 확인해야 하는 요소만이 아닐 가능성은 일단 “YES”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된 내용은 없는 만큼 참고만 하는 게 바람직하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서울아산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권석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