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변비가 심해 배변 주기가 일정하지 않은 영업사원 K 씨(32). 업무상 술자리 모임이 많아 1주일에 2회 이상은 술을 마시는데, 최근 항문에 살이 조금씩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앉아 있을 때 크게 불편하지도 않고, 손으로 밀어 넣으면 다시 들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K 씨의 증상을 들은 동료는 ‘치질이 많다는데, 병원에 한번 가보라’며 걱정했다. 동료의 말에 신경 쓰인 K 씨는 병원을 찾았고, 치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두 달 전부터 배변을 할 때마다 항문이 많이 쓰리고 화장지에 피가 묻어 나오는 20대 초반 여성 C 씨. 변은 묽은 편이지만 처음 나오는 부분이 단단해서 변을 볼 때마다 힘을 많이 주곤 한다.
증상은 달라도 K 씨와 C 씨는 모두 치질이다. 치질은 크게 항문이 늘어나서 항문 안의 점막이 빠지는 치핵, 항문이 찢어지는 치열, 항문이 곪는 치루 등 세 가지가 있다. 이 중 치핵이 가장 많기 때문에 흔히 치질을 치핵이라고도 한다. K 씨가 호소하는 증상은 치핵, C 씨는 치열이다.
만약 항문 주위가 곪아 종기가 생기고, 터진 다음 단단한 것이 만져진다면 치루다. 항문 안쪽에 점액질을 분비해 배변을 돕는 항문샘이 6~12개 정도 있는데, 이 항문샘에 세균이 침입하면 곪았다 터지는 것이다. 종기가 터지면 시원해지고 통증도 사라지지만 본격적인 치루 단계로 발전한다. 가끔은 항문이 열이 나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에 열이 나기도 한다.
“일단 치루가 되면 진물이 조금씩 나오고 술, 기름진 음식을 먹거나 면역력이 떨어질 때마다 붓고 터지기를 반복하면서 만성 치루가 된다”는 것이 대항병원 치질클리닉 이재범 과장의 설명이다.
평소 치질이 의심되는 증상이 있거나 변비로 고생한다면 증상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좋다. 우선 출혈, 탈항이 있다면 치핵일 가능성이 크다. 항문 안쪽의 혈관이 늘어나면서 점막이 함께 늘어져 빠져나오는 것이다. 치핵인 경우 탈항과 함께 통증이 있다.
항문에서 피가 나는 증상은 치핵과 함께 치열일 때도 나타난다. 보통 항문에서 피가 나면 ‘대장암이 아닐까?’싶어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직장암일 때 보이는 출혈은 다소 검고, 끈적거리면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섣불리 출혈의 원인을 판단하기보다는 병원을 찾아 치질 또는 직장암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남성에게 많은 치질은 치루. 남성은 여성에 비해 항문샘이 깊어 청결한 관리가 어렵다. 또한 괄약근도 여성보다 압력이 높아 항문샘의 입구가 좁아지면서 오물이 많이 쌓이고 염증이 생기기 쉽다. 또한 잦은 음주도 한 원인이다. 음주 후 설사로 인해 오물이 항문샘에 잘 쌓이고, 면역력이 떨어져 염증이 생긴다.
치핵도 남성에게 많은 편이다. 복압이 올라가는 골프나 보디빌딩 같은 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을 때 과도하게 힘을 주는 경우, 항문이 빠져 출산 후에도 들어가지 않아 치핵이 생기기도 한다.
흔히 치질 하면 무조건 수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차일피일 병원 가는 일을 미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심하지 않은 치질은 좌욕과 배변훈련만으로도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좌욕을 하면 항문의 괄약근이 이완돼 근육경련으로 인한 통증이 줄어든다. 또한 항문 부위가 청결해지고 혈액순환이 좋아지면서 증상이 개선된다.
좌욕을 하려면 세숫물 정도의 온수를 좌욕기나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5분 정도 항문 부위를 담근다. 좌욕기는 좌변기에 끼워 사용할 수 있어서 간편하다. 보통 의료용품을 파는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값도 저렴하다.
좌욕은 하루에 2~3회 정도 해주면 좋은데, 특히 배변 직후에 해준다. 좌욕을 할 때는 항문을 오므렸다 폈다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때 좌욕 물에 소금이나 소독약을 넣으면 안 되고, 물을 너무 뜨겁게 하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초기 치질을 개선하는 데는 무엇보다 규칙적인 배변습관이 중요하다. 정해진 시간에 배변하는 습관을 들이되, 진짜 변의가 느껴질 때만 화장실에 가야 한다. 진짜 변의가 느껴질 때 화장실에 가면 배에 힘을 주지 않고도 5분 이내에 부드럽게 변을 볼 수 있다.
만약 5분 이내에 배변이 어렵다면 그냥 일어서서 다른 일을 하다가 나중에 화장실에 간다.
습관적으로 한 번에 5분 이상 변기에 앉아 있지 않도록 한다. 화장실에 신문이나 잡지를 들고 가는 것도 피한다. 이런 배변습관을 들이면 치질을 예방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보통 매일 배변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때문에 변비약이나 관장, 장청소 등을 쉽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1주일에 두세 번만 배변을 해도 건강에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고 사람마다 배변리듬이 다르다.
때문에 치질의 증상이 가벼울 때는 좌욕, 배변훈련을 4주가량 해본 다음에 수술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좌욕, 배변훈련 후에도 증상이 더 심해진다면 약물 치료나 수술 등을 고려해야 한다. 치핵의 경우 항문이 밀려나오지 않고 출혈만 있을 경우를 1도, 항문은 밀려나와도 배변 후 저절로 들어가는 경우를 2도라고 한다. 그리고 밀려나온 항문이 저절로 들어가지 않고 손으로 밀어 넣어야 들어가는 경우를 3도, 손으로 밀어 넣어도 들어가지 않으면 4도이다.
병원에서도 1, 2도 초기 치핵일 때는 좌욕이나 배변훈련과 함께 약물로 치료한다. 2도 치핵이나 출혈 등 증상은 있지만 심하지 않다면 비수술적인 치료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무밴드를 이용해 치핵 덩어리를 떼어내는 고무밴드 결찰법, 열로 응고시키는 적외선 응고법 등이 그것이다.
이재범 과장은 “하지만 4도 치핵은 수술이 필요하고 2~3도의 경우에도 증상이 심할 때는 더 병을 키우지 않고 수술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치열 역시 생긴 지 1~2개월 미만의 급성 치열이라면 좌욕을 꾸준히 하고 식습관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치열이 좋아지지 않으면 수술이 필요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항문이 좁아져서 굳어진 경우에는 내괄약근을 조금 절개해 항문을 넓혀주는 수술을 한다.
치루는 더 적극적으로 수술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그냥 낫는 법이 없고 치루가 만성화되면 드물게는 치루암으로 진행될 수 있다. 수술을 할 때는 고름이 나오는 치루관을 절개하고 염증을 일으킨 항문샘을 찾아 내공(염증이 처음 시작된 항문 안쪽 구멍. 외공은 고름이 흘러나온 바깥쪽을 말한다)까지 제거해야 재발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