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은 방송심의규정 제27조(품위유지) 5호, 제30조(양성평등) 2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심의를 받았다. 하지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결국 ‘문제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정도는 작가가 가진 표현의 자유에 포함되며 사회상규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관련 보도가 나간 후 네티즌의 반응은 엇갈렸다.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로 드라마를 보려한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힌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무감각이 드러났다는 지적도 있었다.
<우리 갑순이>처럼 방송 심의는 받지 않았지만 비슷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올해 중순 방송돼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tvN 드라마 <또 오해영>이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는 남녀 주인공의 불같은 사랑을 그리며 서로에 대해 다소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감정 분출을 가감 없이 그렸다.
SBS ‘우리 갑순이’ 방송 화면 캡처.
극중 남자 주인공 박도경은 여자 주인공 오해영을 만나러 갔다가 옛 연인과 마주친다. 오해영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운 박도경은 옛 연인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동차 유리창을 주먹으로 깬다. 차 안에 앉아있던 오해영은 놀란 표정으로 머리를 감쌌다.
반면 오해영은 박도경이 집 안에 옛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본 후 화가 나 창문으로 돌을 던진다. 결국 돌에 맞은 유리창은 산산조각 났다.
또한 오해영은 떠나려는 박도경에게 가방을 던지고 가슴을 때리는 등 폭행을 가했다. 그러다가 박도경은 오해영을 벽에 밀치고 키스를 한다. 이 드라마에서 오해영 역을 맡았던 배우 서현진은 언론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미 좋아하는 걸 서로 아는 상태였고, 일방적 폭력이 아니었다”며 “그렇게(데이트 폭력으로) 보일 거라 생각을 못 해서 좀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또 오해영>을 챙겨보는 시청자 중에서 이 장면을 보며 “데이트 폭력이 심각하다”고 느꼈을 시청자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이 장면을 <또 오해영>의 명장면이자 하이라이트로 꼽는 이들도 있다. 주인공 남녀의 감정이 극도로 분출되며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사회적 인식의 괴리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는 남자 주인공 김주원이 여자 주인공 길라임을 억지로 침대에 눕히는 장면도 있었고, 또 다른 드라마에서 뺨을 때리고 억지로 손목을 끄는 장면은 비일비재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데이트 폭력이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을 때였다. 이렇듯 인식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으니 굳이 그런 장면을 보며 데이트 폭력 운운하는 이들도 없었다.
지금은 인식이 바뀌어가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데이트 폭력이 언급되고, 실제 피해자들의 사례가 뉴스를 통해 소개되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한 드라마 외주 제작사 관계자는 “드라마들이 극적 효과를 누리기 위해 더 과격하거나 극단적인 장면을 보여준다는 측면에 동의한다”며 “단순히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설정인데 이런 드라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대중이 데이트 폭력에 무감각해지며 모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을 무게 있게 수용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진출처=tvN ‘또 오해영’ 홈페이지
드라마보다 데이트 폭력이 심각하게 다뤄지는 영역은 공개 스탠딩 개그프로그램이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희화화된 캐릭터를 배치하고, 그들의 비정상적 행동을 통해 시청자들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은 만큼 데이트 폭력의 수위도 높은 편이다.
일례로 tvN <코미디 빅리그>의 코너 ‘러브 이즈 뭔들’에서는 소개팅으로 만난 두 남녀의 상황을 묘사하며 처음 만난 사람과도 키스할 수 있다는 여자의 말을 들은 남자가 갑자기 혀를 날름거리며 희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여자는 남자의 뺨을 때린 후 “혀 집어넣어요. 싹 뽑아버리기 전에. 혀 뽑히면 죽는 거 아시죠?”라고 말한다. 물론 이 장면을 보며 방청객들과 시청자들은 웃는다.
일부 개그 프로그램은 데이트 폭력을 넘어 ‘여혐’(여성 혐오)을 조장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예쁜 여성에게는 극진히 대하던 남성이 뚱뚱하거나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여성을 하대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또한 각 개그프로그램에는 특정 캐릭터를 가진 개그우먼이 존재한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개그우먼은 주로 몸을 소재로 한 개그를 선보이고, 웃음기 가득한 외모를 가진 개그우먼은 실생활에서 남성들에게 냉대를 당한 내용을 개그의 소재로 삼는다.
이런 지적에 대해 적잖은 이들이 “웃자고 하는데 죽자고 덤빈다”고 얘기할 수 있다. 비하의 의도를 갖지 않았는데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더 문제라는 반발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콘텐츠에 노출되는 동안 부지불식간 외모 비교, 여혐, 데이트 폭력 등이 자연스럽게 인식 속에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한 방송사 PD는 “TV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하루아침에 방송 행태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런 식의 문제 제기와 자정의 노력이 계속돼야 건강한 방송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