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코미디언이자 방송 진행자이며, 할리우드에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2008) <컴백 록스타>(2010) <락 오브 에이지>(2012) 등의 영화 속 독특한 캐릭터로 인상 깊은 러셀 브랜드. 그는 2006년 4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매주 BBC의 라디오 쇼 <러셀 브랜드 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쇼의 하이라이트는 전화 연결 코너. 브랜드는 게스트와 함께 친한 셀러브리티에게 전화를 걸어 허심탄회한 농담을 나누곤 했다.
‘작스게이트’ 피해자 조지나 베일리.
심한 장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0월 16일, 브랜드는 아예 앤드류 작스와 전화 연결을 하려 했다. 작스의 스케줄 상 사전 녹음을 해야 했고, 그날 게스트인 유명 토크 쇼 진행자 조너선 로스와 함께 작스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진 몰라도 작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브랜드와 로스는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겼다. 이때였다. 작스의 대표작 <폴티 타워>에 대한 조크를 하고 있는 브랜드 옆에서 로스는 갑자기 “이 자식이 당신 손녀랑 잤어요!”라고 소리 질렀다. 브랜드는 전화를 끊었고, 사과를 하겠답시고 다시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겼지만 제대로 된 사과는커녕 점점 심한 농담을 늘어놓았다. 나중엔 “우린 합의된 섹스였고, 그녀는 생리중이 아니었다네~”라는 식의 노래를 불렀고, 옆에서 로스는 베일리와 브랜드가 결혼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문제는 이 내용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처음엔 별 문제 없었다. 하지만 10월 25일, 보수 신문인 <더 메일 온 선데이>가 문제 삼았고 브랜드는 방송 중에 작스에 대한 일에 대해 사과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방송 시간의 대부분은 <더 메일 온 선데이>의 자매지인 <데일리 메일>을 비난하는 데 할애했다. <데일리 메일>이 2차 대전 시기 나치에 부역했다며 브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앤드류 작스의 전화기에 욕설을 남기는 것과, 히틀러의 제3제국 건설에 협조하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쁜가요?”
이후 엄청난 후폭풍이 일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 미국의 대선, 콩고 내전 등 당시의 굵직한 이슈를 모두 덮어버릴 정도였다. 10월 28일 BBC 게시판엔 4700개의 항의 글이 올라왔고 하루가 지난 29일엔 그 수가 1만 8000개를 돌파했다. 영국의 방송 및 통신을 규제하는 기관인 ‘오프컴’의 조사가 들어갔고, 고든 브라운 수상마저 “명백히 부적절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사생활이 드러나며 피해자가 된 조지나 베일리는 “러셀 브랜드와 잠깐 만났을 뿐이다. 그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브랜드와 로스 모두 퇴출당해야 한다. 현재 경찰 신고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라디오 쇼 중 돌발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켜 퇴출당한 러셀 브랜드와 조너선 로스.
사태가 급박하게 흘러가자 BBC의 사장인 마크 톰슨은 10월 29일, 러셀 브랜드와 조너선 로스를 일단 방송 출연 정지 시켰다. 그들은 라디오 쇼 외에도 BBC의 여러 프로그램에 진행자 혹은 게스트로 출연 중이었다. 라디오 국장이었던 레슬리 더글러스와 심의 관련 책임자였던 데이비드 바버가 사임했다. 하지만 그들이 브랜드의 방송이 전파 타는 걸 허락한 장본인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앤드류 작스
하지만 자유민주당의 대변인 돈 포스터는 이런 보수적 시각을 비난하며 미디어의 자유와 독립성을 옹호하기도 했다. 브랜드와 친한 셀러브리티들도 나섰다. 오아시스의 리더인 노엘 갤러거는 대표적이었다. 그는 언론이 독재자처럼 구는 게 맘에 안 든다며 “지독하게 영국적인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브랜드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사회적 분위기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서명 운동이 이어졌고, 팬들은 BBC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결국 러셀 브랜드와 조너선 로스는 그 일로 인해 퇴출됐다. 이후 브랜드는 할리우드로 건너가 배우로 활동했고, 로스도 다른 방송사 일을 알아봐야 했다. 11월 18일, BBC는 이전에 여러 차례 사과했음에도 다시 한 번 앤드류 작스와 조지나 베일리와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그날 방송은 ‘너무나 공격적이었으며, 심의 기준의 심각한 위반’이었다며 사죄의 변을 밝혔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