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당한 친박그룹이 총선에서 대거 생환하면 박근혜 전 대표의 당권 접수 가능성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남경필 의원이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불출마를 촉구하고 나섰을 때까지만 해도 파문은 일회성으로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부적절한 인사가 곧바로 바닥 민심 이반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수도권 출마자들을 중심으로 이상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천 잡음과 계속되는 청와대의 ‘헛발 인선’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며, 그 ‘누군가’로 이상득 부의장을 지목하게 된다. 수도권 출마자인 권택기, 박명환, 이수희, 김용태 후보 등이 그 주축이었고 여기에 정두언 의원이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재오 전 최고위원과는 사전에 협의가 안 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을 포함한 55명은 결국 이상득 부의장의 출마포기를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했고 이후 상황은 당내 권력 투쟁으로 급속히 비화됐다. 결국 이상득, 이재오 의원 모두 출마를 선언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되는 모습이지만 갈등은 ‘완료’가 아니라 ‘유보’ 상태로 보는 게 정확하다. 서울과 포항에서 당이 혼란상을 빚고 있던 순간, 박근혜 전 대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과 함께 대구 달성 지역구로 유유히 낙향해버렸고 강재섭 대표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재오, 이상득, 정두언, 강재섭, 박근혜 등 당내 세력구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거물들이 동시에 언론의 관심사로 등장하는 보기 드문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당에서는 이번 파문을 ‘총선 후 당권 경쟁’과 연계시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단 최대의 피해자는 이재오 의원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본인의 의지야 어찌됐든 이상득 부의장의 용퇴를 촉구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다가 실패한 모양새가 됐다. ‘서명’에 참여했던 한 인사의 얘기.
“이재오 의원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면담한 후 곧바로 불출마를 선언했어야 했다. 수도권 소장파 55명이라는 막강한 후원세력을 일시에 확보한 셈인데도 이를 활용치 못했다.”
이 의원 본인부터 청와대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즉시 불출마를 선언하고, 이상득 부의장의 불출마까지 이끄는 수순으로 갔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의원이 머뭇거리는 동안 결국 ‘55명’은 이 부의장 측으로부터 ‘심리적인 각개격파’를 당해 버린 꼴이 됐다. 현재로서는 소장파들이 총선 후 또 다시 이 부의장의 거취를 놓고 문제를 삼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이때 이 의원이 또다시 그들의 ‘리더’가 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게 돼버렸다.
이상득 부의장도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당내 화합, 계파 간 조정자’를 자임하던 이 부의장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당내 화합의 최대 걸림돌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서명 파문’을 일단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총선 이후부터 7월 10일 전당대회 때까지 또 한 번의 ‘집중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청와대로서도 안정적 당·정(여당-정부) 관계 유지를 위해서 언제까지나 이 부의장을 품고 가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당 안팎에서는 이번 파문의 최대 ‘수혜자’로 박근혜 전 대표를 꼽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공천 과정에서 ‘수족’을 잃는 아픔을 맛봤지만 날카로운 ‘반격’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확인시키고 당내 견제세력인 친이 그룹에 깊은 내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청와대 내부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한때 박 전 대표의 충청권 출마가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 심도 깊게 논의됐지만 박 전 대표 측에서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표가 이회창 전 총재와 맞대결을 펼치면 충청권에서 바람이 일 수도 있고, 패하더라도 박 전 대표로서는 ‘장렬한 전사(戰死)’가 되면서 오히려 국민적 지도자로 다시 도약할 수 있었을 텐데 불발 카드가 됐다는 전언이다.
▲ 이재오 의원(왼쪽), 이상득 부의장 | ||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는 “강재섭 대표는 독하게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결국은 탈당파를 모두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당이 과반 의석을 넘더라도 친박계 비주류 의원이 40명 존재하는 ‘불안한 동거’가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경우 이 대통령으로서는 싫든 좋든 박 전 대표 측에 당권을 맡기는 ‘당·정 분리’의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참여정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정 분리를 시도하던 전철을 밟게 되는 셈이다. 바로 이 점이 박 전 대표가 노리는 최적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물론 박 전 대표가 직접 당권에 도전하기보다는 친이계 내부에서 박 전 대표와 그다지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던 인사를 박 전 대표 측이 ‘임명 동의’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차원에서 김형오 홍준표 정몽준 의원 등 총선 후 ‘역할’을 할 것으로 보는 당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 특히 정 의원의 경우 입당 전부터 ‘가장 친한 한나라당 의원은 이재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재오 의원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박 전 대표 측과도 별다른 감정 다툼을 벌인 적이 없다는 점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 다른 당 관계자는 “만일 맹형규 의원이 이번 총선에서 공천만 받았다면 차기 당 대표 감으로 0순위였다”면서 “당 스스로 위기에서 당을 구할 인재 풀을 좁혀놓아 버렸다”고 지적했다.
스스로 지역구를 내던진 강재섭 대표는 일단 청와대의 ‘확실한 신임’을 다시 받았다는 점에서 총선 이후 오히려 원외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당 일각에서는 강 대표가 ‘추대’의 형식으로 당 대표를 다시 한 번 맡을 수도 있고, 재·보궐 선거를 통해 다시 한 번 원내 진입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당 대표 이상’을 꿈꾸고 있는 강 대표로서는 지금과 같은 ‘허허실실’ 전법을 언제까지 구사해야 하는지, 총선 후 본격화될 당내 권력 투쟁 과정에서 얼마나 견고하게 계파 의원들을 단속할 수 있을지가 숙제로 남아 있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