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하씨 모한재 종중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경남 하동 모한재에서 소장하고 있던 겸재 하홍도(1593-1666) 선생 관련 고문헌을 기증했다.
겸재 하홍도 선생은 남명 조식 선생 사후 70평생 동안 남명의 제자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남명의 문집 간행 등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학자로, 예학(禮學)에도 뛰어나 약천 남구만, 미수 허목 등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남명 이후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기증받은 고문헌은 겸재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1912년에 판각된 겸재집 목판 97점과 고서 225권 등 모두 322점이다.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기증의 의미는 남다르다. 모한재 기증 고문헌을 살펴보면 경남지역 남명학파의 수난사와 고문헌 관리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겸재 하홍도가 1666년 별세하자 1676년 겸재가 살던 마을에 종천서원을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1758년경에는 겸재의 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했다.
겸재집이 간행되던 시기는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경남지역 남명학파는 여전히 건재하였다. 이에 경상도에 부임한 관리는 남명학파를 무력화시키고자 남명학파의 대표적 존재인 겸재 하홍도 문집의 내용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1779년 이태빈 등이 겸재집 속에 대북파의 거두로서 인조반정 당시 처형된 정인홍과 이이첨 등을 존숭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왕에게 상소했다. 이로 인해 종천서원에서 겸재의 위패가 축출당하고, 겸재집 초간본은 불태워져 희귀본이 됐다.
또 겸재집 간행을 주도한 겸재의 증손 하대관은 9개월간 감옥에 수감되고 다섯 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은 후 함경도 길주로 귀양보내졌다. 그러나 경남지역 남인 유림은 여러 시련을 견뎌내며 저항하였고, 결국 정조의 탕평책과 번암 채제공 등 남인의 후원으로 문제가 일단락됐다.
조선말기에는 겸재 선생의 글이 후세에 전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경남의 선비들은 겸재 문집을 다시 간행할 것을 결의하고, 후손 하성로를 주축으로 삼아 문집 간행 작업에 착수하였다. 1912년 문집 목판 판각이 완성되자 면우 곽종석의 발문을 붙여 12권 6책 분량의 중간본을 간행하고 판각된 판목은 별도로 보관하여 왔다. 현재 전하는 겸재집은 대부분 이번에 기증한 목판으로 인쇄된 책이다.
겸재집 목판은 사림산 중턱 모한재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인적이 드물어 도난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다. 목판은 본래 219장이었으나 소장해 오는 과정에서 이미 123장을 분실하고, 96장만 남아 있었다. 문중에서는 남은 목판을 잘 보존하기 위해 마을 한가운데에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하고 여기에 모한재 소장 잔여 목판과 고서를 옮겨와 보관해 왔다.
이를 발견한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이상필 교수는 경상대학교에 고문헌도서관이 건립되었으니 여기에 기증하여 보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문중에 건의했다. 이에 겸재의 후손이자 모한재 대표인 하창선 씨가 경상대 고문헌도서관을 방문하해 시설을 둘러보고 담당자와 협의를 진행한 결과 고문헌 전체를 2016년 12월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하창선 씨는 “남명학파의 정신이 이어지고, 역사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은 문중 고문헌을 이제라도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의 우수한 시설에 기증하여 전문적으로 보존 관리하게 되어 후손으로서 매우 다행이다”라고 기증 소감을 밝혔다.
마호섭 도서관장은 “고문헌도서관 건립 후 경남에서 상징성이 큰 인물의 고문헌을 기증받게 되어 더욱 의미가 있다. 겸재집 목판은 향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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