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형사사건을 맡은 여성의뢰인들 중의 한명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나는 속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변호사는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된 사람에게 유리한 신문을 이끌어 가며 변호하는 게 기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 일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런데도 무죄를 이끌어낸 변호사가 신문을 했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검사 놈이 나쁜 놈이야. 저쪽에서 돈을 쳐 먹이니까 항소했을 거야. 제 놈이 뭐라고 항소를 해 항소를 하긴?”
험한 환경에서 배우지 못하고 살아온 그녀의 피해의식에서 나온 말 같았다. 무죄판결로 기소가 실패한 검사는 항소하는 것이 당연했고 검사의 당연한 권리였다. 옆에 있던 다른 여성변호인이 불쾌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우리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법원에 가야해? 변호사님 나 앞으로 판사가 재판한다고 불러도 절대 가지 않을래. 판사 나쁜 사람이야. 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나를 자꾸만 부르는 거야? 나 절대 법원에 안가”
나는 요즈음 특별한 사람들을 변호하고 있다. 그들은 거의 극도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경찰서에서 한글로 자기이름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그들은 특정종교단체 내부에서 수십년동안 주문만 염송하며 세상과는 격리되어 사는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재판이 뭔지 설명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삼심제도의 재판상 고등법원과 대법원까지 가야 한다는 상식조차 통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경험만 가지고 있는 그들은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면 악마가 그들을 침범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악마는 이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변호사를 하다보면 이 세상의 뒤쪽 그늘에 있는 그럼 사람들과도 자주 만나곤 했다. 그들은 고소를 당하고 법정에 선 사람들이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고소를 당해 보기도 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확신을 하는데 경찰서의 담당형사한테 소환당하는 것부터 불쾌하다. 담당형사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매같이 이미 나를 범죄자로 취급하면서 나의 감정을 파괴하고 날카로운 부리로 속살을 뜯으려고 덤빈다. 형사의 본능이다. 검사도 마찬가지다. 표본 앞에 선 해부자처럼 냉정하다. 옥석을 가리는 법정에 서면 이름이 없어지고 명칭은 ‘피고인’이 된다. 어느 법정에서였다. 법대위에 검은 법복을 입고 근엄하게 앉아있는 판사들을 향해 한 노인이 바닥에 발을 구르며 발광상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왜 피고인이여? 뭘 잘못했단 말이여?”
피고인이라는 명칭에 익숙했던 재판장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라도 법의 덫에 걸리면 오랜 시간 어둡고 축축한 법의 터널을 뚫고 나와야 하는 것이 민주사회에서의 법적인 절차다. 법은 하나님처럼 인간의 과거와 행위와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람들 중에는 근엄하게 앉아있는 판사가 하나님 같이 해줄 것으로 착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책상물림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만 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가난과 고난의 터널 속 장애물에 걸려 있는 사람은 고속도로 위에서 공부에만 올인 해야 가능한 판사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공부도 양극화가 심한 세상이다. 나는 오후 내내 배움이 짧은 여성의뢰인들에게 초등학생들이 배우는 기초를 설명해 주느라고 진땀을 뺐다. 형사나 검사가 부르면 일단 가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잘못이 없으면 안가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판사가 법정으로 불러도 가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한번 말하면 됐지 왜 또 판사한테 까지 가야 하느냐면서 화를 냈다. 그들은 왜 고등법원이 있는지 대법원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재판은 한번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변호사에게 돈만 주면 변호사가 다 알아서 처리해 주는 것으로 아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변호사를 그만두고 싶다. 무죄판결을 받아내 주었는데도 법정에서 변호사가 그들을 신문했다고 화를 내니 말이다. 수술해서 완치가 되게 한 의사에게 수술했다고 원망을 하는 식이니 말이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