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시위를 하는 노인 몇 명이 궁상스러운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아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매일같이 구치소 앞에 와서 박근혜대통령의 석방을 호소하는 것일까. 감옥 안에 있는 입장에서는 그들이 고맙고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변호사 접견실은 들끓는 역 대합실 같이 젊은 변호사들이 꽉 차 있었다. 30년 전 막 변호사사무실을 차렸을 때 구치소는 강북의 독립문 옆의 현저동 언덕에 있었다. 일제 시대지은 붉은 벽돌건물의 사동들이 드문드문 서 있던 내부는 한적했다. 접견실에서 대기하는 변호사들도 거의 없었다. 오후에 잠시 접견을 하고 돌아 나올 때면 식당에서 증기로 밥을 찌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 나오곤 했다. 더러 교도소 식당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파란 죄수복 위에 흰 앞치마를 두른 재소자가 스레인리스 식판에 밥과 국 그리고 밭에서 키운 상치와 쌈장을 담아다 주기도 했다. 교도관들은 시내의 변호사들을 대개 알고 있었다. 활동하는 변호사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뀐 것 같다. 로스쿨을 나온 젊은 변호사들로 구치소 변호사 접견실은 꽉 차 있었다. 담당 교도관들도 누가 누군지 거의 모르는 것 같았다. 마이크로 재소자의 수감번호와 기다리는 변호사의 이름을 부르고 다른 교도관은 작은 유리방을 기계적으로 배정하기에 바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유리상자 같은 수많은 접견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피의자와 변호사의 모습들이 어항속의 물고기들처럼 환히 비쳤다.
예전에는 교도소의 담당 교도관이 기다리는 변호사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면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정이 모두 말라버리고 교도소 변호사 접견실은 물이 빠진 저수지 같이 메마르고 삭막해 졌다. 새로 세상에 나온 젊은 변호사의 물결 속에 끼어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접견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접견실 구석에 한 늙은 변호사가 가만히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역시 강가로 밀려난 조약돌 같이 다른 젊고 활기찬 변호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마와 볼에 굵게 파인 주름과 메마른 피부를 쳐다보면서도 어딘가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기억의 바닥을 퍼 올려 봤다. 그랬다. 40년 전 법무장교훈련을 같이 받았던 사람이었다. 행군을 할 때 항상 내 앞에서 가던 운동신경이 좋은 동기생이었다. 내가 그를 보며 인사했다.
“저 인천의 김 변호사 아니세요?”
“아? 예, 엄 변호사 맞죠? 조금 전에 나도 봤는데 긴가민가해서 망설였어요.”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세월이 풍화시킨 건 그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활동을 많이 하시나 봐요?”
내가 위로조로 그렇게 말을 했다.
“아니 예요. 아는 형님이 구속이 돼서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어요. 담당변호사는 따로 선임했어요. 늙고 사건도 없는 변호사지만 이렇게 감옥으로 찾아와서 위로를 해 주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아요. 내가 책을 구치소로 보내줬더니 아는 형이 감옥 안에서 그걸 다 읽고 내게 편지를 써서 막 부쳤는데 내가 찾아와서 너무 좋다는 거예요. 변호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감옥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나누고 마주앉아 부담 없이 얘기를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사람마다 하나님이 준 달란트로 그리고 자기가 하던 직업으로 나이 먹고도 세상에 참여하는 건 소명이자 보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바깥세상에서는 밥 한 끼 사줘도 별 게 아닌데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는 십 만원을 영치금으로 보내주면 정말 고마워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감옥안과 밖의 돈의 가치는 또 다른 것 같았다.
“맞아요. 그 돈이면 정말 요긴하게 쓰는 것 같아요.”
김 변호사가 활짝 미소 지으며 화답을 했다. 구치소 철문을 나와 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인덕원역 쪽으로 걸어간다. 바쁘던 시절은 항상 차를 타고 정신없이 그 길을 오고 갔다. 이제는 한발 한발 땅을 음미하며 길바닥 틈에 몸을 비틀며 솟아나온 풀들도 감상하며 걷는다.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갑자기 어제 밤 읽은 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감옥 안 사형수가 묵던 방안 흰 벽에 모나미 볼펜으로 적혀 있었다는 이런 내용이다.
‘인생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