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정몽헌 회장이 뒤따라 2월16일 기자회견을 갖고 DJ정부와 입을 맞췄지만 그것 역시 효과 없기는 마찬가지다. 김정일과 만나는데 왜 돈을 바쳐야 했을까. 그게 의혹의 뿌리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김일성의 죽음으로 무산된 1994년의 남북정상회담 준비과정을 되돌아보면 김대중·김정일 회담은 풀리지 않는 게 너무 많다.
그해 여름, 김영삼 한국 대통령과 김일성 북조선 주석 간에 합의한 남북정상회담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주선했다. 핵 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때 카터는 평양방문을 발표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북한이 핵 특별사찰을 끝내 거부하면 핵 개발기지를 폭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북폭을 반대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럴 때 카터의 평양방문이 발표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카터의 평양방문 소식을 듣고 곧바로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카터의 북한 방문에 대해 물었다. 클린턴은 카터의 평양방문에 별로 기대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이 가기로 한 이상 미국 정부로서는 최대한 협조하고 결과를 지켜볼 것이라면서 카터가 먼저 서울을 방문, 김영삼 대통령에게 평양에 가는 배경을 설명하고 한국의 입장을 사전에 타진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카터는 평양으로 가기 전 서울에 들러 김영삼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했다. 카터는 김일성을 만난 뒤 귀로에 서울에 다시 들러 YS에게 평양회담의 내용을 설명하기로 했다.
YS는 평양회담을 마치고 서울에 온 카터를 역시 오찬에 초대했는데 이 자리에서 카터는 남북정상회담을 중재하고 나섰다. 자신이 김일성에게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는 것이 핵 위기를 푸는 길이라고 말했더니 김일성이 이를 수락했다고 카터는 말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한 일이 한 번도 없다. 우리가 핵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가 나와 만나지 않겠다고 말해 나도 그와 만나려 하지 않았다. 핵무기를 내놓지 않으면 악수도 않는다는 사람과 무엇 때문에 만나야 하는가’라고 김일성은 내게 반문했다. 내가 김일성에게 대화를 통한 해결을 원하는 김 대통령의 진의를 전했다. 그랬더니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이 나와 만나지 않겠다고 했던 말을 취소한다면 만나겠다’고 말했다.”
카터는 YS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김일성의 정상회담 수락, 너무 쉽게 나온 것이어서 YS는 반신반의했다고 했다. 재차 카터에게 물었다. 카터는 명백히 김일성 주석이 회담을 희망했다고 단언했다. ‘그럼 지금 당장 발표해도 좋은가’라고 했더니 카터는 그렇다고 확인했다. 이래서 기자들에게 카터가 제안한 남북정상회담을 김일성이 수락했으며 김영삼 대통령도 회담을 갖는 데 동의, 곧 북한의 진의를 타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예비회담은 판문점에서 열렸다. 남쪽은 이홍구 통일원장관을 수석대표로 한 대표단이었다. 예비회담은 남과 북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첫 난제는 회담장소. 남쪽은 서울, 북쪽은 평양을 내세워 대립했다. 무려 세 시간을 이 문제로 논쟁했다. 그러나 서울측은 애초부터 ‘회담장소는 양보한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훈령을 받고 있었다. YS는 “김일성은 건강도 좋지 않다. 결코 서울엔 오지 않을 것”이라며 생색을 내며 이를 받아주고 다른 문제에서 상대의 양보를 얻는 지렛대로 활용하라고 훈령한 것.
▲ 지난 94년 6월28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이홍구 남측대표(오른쪽)와 김용순 북측대표.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물거품이 됐다. [95보도사진연감] | ||
실무회담은 이 대목에 걸려 교착상태였다. 해결은 청와대 훈령. 김영삼 대통령은 이홍구 부총리를 전화로 불러 답방 문제는 평양회담에서 논의, 결정하는 데 대한 북한의 동의를 받는 선에서 타결하라고 훈령한 것이다.
두 문제가 타결된 후에도 북쪽이 난색을 표시하고 남쪽은 결코 수정할 수 없다고 맞선 사항들이 몇가지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수행원이었다. 서울측은 수행원 1백80명, 이중 80명은 기자들이라고 했다. 평양에선 기자 수에 난색을 표시했고 서울측은 외신기자도 포함돼 80명도 적은 수라며 줄일 수 없다고 했다.
이 문제에 결단을 내린 건 김일성 주석. 그는 전화로 북측 대표단에 이런 지시를 했다.
“기자들 80명이 아니라 8백 명이 와도 좋다. 기자들이 많이 온다고 하는 것은 평양에 와 보고 싶다는 것 아니냐. 그들이 평양에 아무리 많이 와서 돌아다녀도 문제될 게 없다. 카터도 평양이 서울보다 좋고 평양만큼 깨끗한 도시는 없다고 말하더라.”
다음 사안이 경호. 사전 점검이나 합동경호 등은 정상회담의 관례를 따르는 것으로 해 문제될 게 없었다. 정작 문제는 두 정상의 단독대좌 때 경호원을 둘씩 대동하자는 서울의 제안이었다. 평양측은 그런 관례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남쪽은 관례를 내세우는 북쪽 얘기를 일축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 문제만은 ‘양보불가’라는 훈령을 미리 주고 있어 남쪽도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주석궁이 이를 받아들이라는 전화훈령을 보내 가까스로 타결했다.
세 번째가 회담일정. 서울측이 3박4일을 제시하자 평양측은 좀 여유를 두자고 했다. 이것도 서로 우기다보니 난제가 되었다. 결국 이건 서울이 양보했다. “아마 김일성이 건강 때문에 촉박한 일정을 소화하기엔 벅찬 모양이다. 하루를 더 잡는 융통성을 보이라”고 YS가 훈령했다.
준비회담에 참여했던 고위 인사 P씨는 당시의 일을 회고하면서 ‘두 정상의 단독대좌에 경호원을 동반하자’는 YS의 제안을 상기시켰다.
“이건 경호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회담에선 비밀스런 대화는 없다는 걸 북측에 통고한 것이다. 회담 전이나 후나 밀담이 있었다는 의혹의 소지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배려가 이 제안에 깔려 있었다. 비밀은 없다는 걸 내외에 확인시키는 것, 이것이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 유의해야 할 기본사항이었다.”
P씨는 “YS는 이 점에 철저했다. 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일정을 경호원과도 차단된 둘만의 차 안에서의 비밀회담으로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이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고 의혹으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6·15정상회담은 첫 단추부터 실패한 회담으로 봤다. 그런데 이제 보니 준비부터 아주 잘못되었다. 왜 정상회담 준비회담을 비밀리에 싱가포르에서 장사꾼과 이마를 맞대고 논의했는가? 이것부터 의혹이고 수수께끼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YS와 만난 얘기도 했다. YS는 얼마 전 일본의 한 월간지 기자와 회견했다. 그런데 일본인 기자가 2000년 겨울 한 이탈리아 실업인이 1억달러를 바치고 김정일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 믿기 어려운 이상한 얘기로 들려 그 이탈리아 사람을 찾아가 확인했더니 그 사람이 사실을 시인하더라는 것. 그러면서 이 일본인 기자는 “김정일 면회엔 돈이 필수고 돈만 있으면 김정일과 회견할 수 있는 모양”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YS가 대북 뒷거래에 의혹이 있다고 단정하고 DJ에 대한 사법처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그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P씨는 설명했다. 이영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