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총선을 전후해 여야 모두 극심한 공천 파동을 겪었고 전·현직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 사건도 어김없이 터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기록물 유출 사건에 휩싸여 검찰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의 선거법 위반 사건 등은 표적·기획 사정 논란과 맞물려 정쟁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노건평 씨 사건을 계기로 현실화 단계로 접어든 ‘친노 게이트’ 사건은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기면서 적잖은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송년 특집으로 2008년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던 5대 사건을 선정해 그 막전막후를 들여다봤다.
1 여의도 지각변동 부른 공천 파동
18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은 공천 파동으로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개혁·혁명 공천을 기치로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양 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지역 현역 의원이 각각 43%와 30% 교체됐다는 사실은 당시 공천 태풍의 위력을 대변하고 있다.
공천 칼날이 매서웠던 만큼 후유증도 극심했다. 공천 경쟁에서 주류 세력에 밀린 한나라당 내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계와 민주당 내 구 민주계와 동교동계는 ‘음모론’ 등을 제기하면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는 등 적전분열 양상으로 치달았다.
4·9 총선 후에도 ‘공천 파동’ 후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여의도 정치권 주변에서 ‘공천 헌금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산되면서 급기야 사정당국의 내사설까지 나돌아 정치권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 소속 일부 의원들이 공천 헌금 문제로 사법처리를 받게 됐을 뿐 집권당과 제1 야당의 공천 헌금 문제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상태다. 군소 정당들이 표적·보복 수사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4·9 총선을 전후해 폭발한 ‘공천 파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분위기지만 그 앙금은 여전히 잠복된 상태다. 한나라당은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계와 친박계의 권력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민주당 역시 신주류와 구주류 간의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천 파동’ 앙금이 여야를 망라하고 정계개편을 촉발할 수 있는 뇌관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2 노무현 죽이기 시작? 대통령 기록물 유출 사건
지난 6월 불거진 대통령기록물 유출 논란은 전·현 정권 간의 감정싸움과 진실게임을 넘어 검찰 수사로 비화된 상태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전 참여정부 시절의 각종 청와대 기록들을 고향인 경남 봉하마을로 가져간 게 발단이 됐다.
▲ 이명박 대통령(왼쪽), 노무현 전 대통령. | ||
양측의 팽팽한 신경전은 노 전 대통령이 7월 16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실상 ‘백기’를 들고, 사흘 후(7월 19일) 기록물을 국가기록원에 반환하면서 봉합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기록물의 추가 유출 여부 확인을 위해 봉하마을에 설치돼 있는 ‘e지원’ 서버 등 전산 장비 반환 여부를 놓고 양측이 또다시 맞서면서 결국 검찰 수사로 확전됐다.
국가기록원이 7월 24일 대통령 기록물 무단 유출 사건과 관련해 참여정부 관계자 10명을 검찰에 고발하자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 방법과 관련해 방문, 서면, 서면 후 방문조사 등을 놓고 고민하다 11월 14일 ‘봉하마을 방문조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다음날(15일) ‘차라리 검찰에 출두하겠다’는 초강수로 맞섰다.
노 전 대통령과 검찰이 팽팽한 대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세종증권 매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기록물 사건은 새 국면을 맞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 씨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친노 게이트’로 확전되자 상대적으로 기록물 사건은 후순위로 밀렸다.
검찰은 세종증권 사건을 마무리하고 내년 초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 및 대통령기록물 사건을 처리한다는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록물 사건이 세종증권 사건에 밀려 잠시 잠복 국면을 맞고 있으나 새해 벽두부터 전·현 정권 간 파워게임을 부추기는 화약고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3 이번 정권서도 역시 김옥희 공천 청탁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언니 김옥희 씨의 공천 청탁 사건은 현 정부 출범 후 첫 대통령 친인척 비리라는 점에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김 씨는 18대 총선 공천이 한창이던 지난 2~3월 브로커 김태환 씨(구속기소) 등과 김종원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에게 접근해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공천되게 해 주겠다”며 세 차례에 걸쳐 10억 원씩 30억 원을 수표로 건네받고 3000만 원은 현금으로 받아 챙긴 혐의로 8월 1일 구속됐다.
특히 브로커 김 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김 씨가 청와대, 한나라당, 대한노인회 등 세 곳에 10억 원씩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해 공천 로비 과정에 여권 핵심부도 개입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부추기기도 했다. 검찰은 계좌 추적 등을 통해 돈의 사용처를 파헤치는 동시에 정치권 로비 및 여권 핵심부의 외압 여부 등을 조사했지만 더 이상 수사가 진척되지는 않았다.
10월 29일 1심 재판부는 공직선거법위반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 씨에게 징역 3년과 추징금 31억 8000만 원을 선고했고, 브로커 김 씨와 김 이사장(법정 구속)에 대해서도 각각 징역 1년 6월과 징역 1년을 선고했다. 현재는 서울고법에서 김 씨 등에 대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김옥희 씨 사건은 개인 사기극으로 종결됐지만 현 정부의 첫 ‘대통령 친인척 비리’라는 점에서 MB(이명박 대통령의 이니셜)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혔고 한나라당의 공천 의혹을 키우는 불씨로 작용하기도 했다.
4 민주당 동반 추락 김민석 사태
검찰과 극한 대치 끝에 구속된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 사태는 김 최고는 물론 민주당까지 수렁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민석 사태’는 검찰이 10월 29일 김 최고에 대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정치권 이슈로 급부상했다. 검찰은 김 최고가 18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업인 2명으로부터 2억여 원씩 모두 4억 7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잡고 김 최고에 대한 신병 확보에 나섰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봉하마을 전경. | ||
문제는 검찰의 여죄 수사 결과 김 최고가 기존 혐의 외에 사업가 강 아무개 씨에게서 불법 정치자금 2억 5000여만 원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김 최고가 받은 정치자금 총액은 7억 2000여만 원으로 불어났고 그는 12월 12일 구속기소됐다. 김 최고는 검찰 조사 내내 진술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지만 여러 정황상 그가 실형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김민석 사태는 김 최고 개인의 정치생명은 물론 민주당 지도부의 전략부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가뜩이나 어려운 민주당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김 최고와 당 지도부가 ‘야당 탄압’ 운운하며 ‘버티기’를 고수했을 당시 민주당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추락하기도 했다.
5 ‘아, 형님이 결국…’ 노건평구속&친노게이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 씨가 세종증권 매각 비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12월 4일)된 사건은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기는 동시에 그동안 말만 무성했던 ‘친노 게이트’를 현실화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실제로 현 정부 출범 이후 사정당국은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과 참여정부 실세들을 겨냥한 전 방위적인 사정작업을 추진해 왔다. 사정당국 주변에서 각종 ‘사정 리스트’가 끊임없이 나돌았지만 ‘게이트’로 불릴 만한 굵직한 권력형 비리는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증권 매각 비리 사건이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노건평 씨를 비롯해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인 정화삼 형제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친노 게이트’로 확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검찰과 정치권 주변에서는 ‘박연차 리스트’ 와 ‘정대근 리스트’가 확대·재생산되면서 여야를 망라해 정·관계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검찰은 ‘리스트’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노건평-박연차-정대근 등 세종증권 게이트의 핵심 주역들이 주고받은 돈의 출처와 최종 종착지를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세종증권 사건이 ‘친노 게이트’를 넘어 여야를 망라한 대대적인 정치권 사정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세종증권 사건 외에 친노 핵심인사 다수가 또 다른 권력형 비리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구 정권을 겨냥한 사정몰이가 내년에도 지속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신상우 전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는 이미 검찰 수사 선상에 올라있고, 세 차례의 영장 청구 끝에 12월 17일 구속된 김평수 전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의 비리 사건에도 참여정부 실세로 통했던 A 씨가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과 친노 그룹의 시련기는 내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