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토요일 오후 방에서 혼자 본 명화 ‘세븐’의 한 장면이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른세 살부터 예순다섯살이 된 지금까지 변호사생활을 해 왔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직업을 보는 시각이 많이 변해왔다는 걸 느꼈다.
가난한 변호사로 혼자 막 개업을 했을 때는 찬바람 부는 어두운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벌어서 가족이 먹고 살아야 했다. 돈만 준다면 뭘 못하겠어? 악마의 그런 속삭임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돈 몇 푼을 받고 살인사건도 맡았고 또 조직폭력배들의 변호도 맡았다.
그들 중에는 이미 영혼이 빠져버린 좀비같이 변질된 자들이 많았다. 본능만 남아 다른 이의 피를 빨고 살을 뜯어먹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전염되어 가는 것 같았다. 살인범을 변호하는 한 법정에서였다. 방청석 뒤에 앉았던 죽은 여인의 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 법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가 피가 다 빠진 듯한 하얗고 무서운 표정으로 내게 손가락을 쳐들면서 소리쳤다.
“당신 그렇게 살인범을 두둔하는 거 아니야. 재판장님 내 딸을 죽인 저 놈도 사형에 처해 주세요.”
법정 앞에서 죽은 아버지와 동료들이 나를 둘러쌌다. 곧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올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나는 억울했다. 법은 살인범이라도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변호사라는 내 길을 간다고 생각했다. 그날 잠이 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일어나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 것인지. 그 살인범을 왜 변호했는지 내면의 나에게 솔직히 물어봤다. 그랬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변호를 했다.
돈이란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돈만 일단 받으면 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정의에 둔감해지고 승부욕에만 집착했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고용된 양심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악마의 낚시미끼를 탐내다가 아가미가 꿰어져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 같았다.
어느 날 민사법정에서 상대편 변호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펌에서 나온 세 명의 변호사가 나와 싸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화려한 경력을 가진 허여멀건 미남들이었다. 검은 법복을 입고 법대위의 붉은 의자에 앉았을 때는 전능해 보이던 사람이다. 재판이 시작됐다. 그들의 입에서 녹음이 된 듯 화려한 수사의 변론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보기에 그들이 받들어 모시는 분은 정말 나쁜 놈이었다. 몇 년을 뼈가 빠지게 혹사당하고도 임금을 한 푼 주지 않은 악덕기업주였다. 하나님은 일꾼의 품삯을 넉넉히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주라고 했다. 그들이 변호하는 기업주는 대형로펌에 큰돈은 줘도 노동을 한 사람의 품값은 주지 않았다. 상대편 세 사람의 변호사를 보는 순간 착시현상이 왔다. 사람이 아니라 잘생긴 마네킹들이 와서 입을 벙긋벙긋 하면서 속에 있는 녹음된 소리들을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내남없이 변호사들이 영혼을 되찾으면 조금은 좋은 세상을 만들 텐데.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