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누구를 첫 번째 부장으로 만나느냐가 중요해. 내가 처음 모신 부장은 법정에서 변호사나 당사자가 뭘 모르면 막 혼을 냈어. 배석판사로 옆에서 그걸 보면서 재판은 그렇게 해야 하는 걸로 알고 나도 따라했지.”
그 친구가 부장판사로 진급하고 재판장으로 있을 때 법정에서 변호사인 내게 질타하듯 던진 한마디가 지금까지 가시같이 마음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게는 가시 같이 아팠지만 무시나 능멸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이 배운 대로 했던 것이다.
“혼나는 사람은 마음이 아픈데 몰랐어?”
내가 되물었다.
“정말 몰랐어. 재판은 그렇게 소리치고 혼내야 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내가 처음 모시던 부장님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야.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한문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어. 입에 줄줄이 고사성어가 나오는데 내가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리고 판결문을 쓸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이야. 난 판결문도 그렇게 써야 하는 걸로 배우고 그대로 지켰지. 첫문장을 ‘피고인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피고인이’로 시작할 것인가도 엄청 고민했어. 나중에 보니까 그게 좋은 게 아니더라구.”
판사들은 그렇게 철저한 도제식교육이었다. 지나간 판사생활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판사들이 나름대로 다들 자존심이 강하잖아? 판결문을 쓰는데 다른 판사들에게 뒤쳐져서는 안 되겠다는 스트레스가 강하지. 처음에는 사건이 밀리면 법원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고 판사실에서 판결문을 썼는데 능률이 잘 오르지 않았어.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기록을 다 싸들고 집으로 갔어. 집에 가자마자 한잠 자고 일어나면 새벽 세시야. 고시공부 하듯이 그때부터 기록을 읽고 판결문을 썼어. 판사 생활이라는 게 사법부의 담 안에서 벌이는 무한 경쟁이야.
대법원판례나 법률서적을 찾아보기도 벅찼지. 그러다가 한번은 모임에 나가서 내가 ‘정말 뭘 모르는 구나’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어.”
“그게 뭐였는데?”
내가 물었다.
“어떤 식사자리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거기 유명한 소설가와 명사들이 있는 거야. 정치와 사회문제 그리고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이 흘러나오는데 난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 하겠는 거야. 판사는 했지만 난 사회의식도 없고 진짜 알아야 할 교양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어. 쓴 웃음만 짓고 그 자리를 나왔어.”
같이 점심을 먹던 판사출신의 다른 친구가 그 말을 들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얼마 전 어떤 인권단체의 이사로 추천을 받았는데 내가 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판결을 했던 사건이 떠오르면서 비판하는 발언이 있었어. 반성해 보니까 내가 그 판결을 할 때는 사회의식이 없었어. 그냥 실정법만 보고 기계적으로 판결을 한 거야. 뒤늦게 깨달은 게 많아.”
친구인 그들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착한 품성을 가지고 자란 모범생이었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끈기 있게 했다. 그런데 그들이 법관사회의 틀에 박혀있을 때는 답답해 보였다. 조직과 법복과 판사실이라는 박스 속에서 기록만을 통해 세상을 스크린 하고 있었다. 판사를 그만두고 세상을 헤엄치면서 그들은 깨달았다. 만약 그들이 다시 법관으로 임명하는 재활용시스템이 되면 솔로몬 같은 명판관이 될 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사회는 한번 무대에서 퇴장하면 다시 오르는 길이 없다. 그들을 다시 쓰는 것도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