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수다를 떨거나 심술 맞고 교만한 부자집 시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장면을 본 것 같다. 나의 뇌리에는 화면에 나오는 그녀의 천박한 허상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남편도 잃고 다 큰 아들도 교통사고로 죽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늙어서 외톨이가 된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던 나는 ‘여기까지, 그만’이라는 그 한마디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녀의 표정이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녹화를 펑크 낼 수 없어서 그냥 촬영했다고 했다. 하필이면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고 했다. 슬픔이 가득 한 채 채우고 가장 신나는 장면을 연기하는 건 매를 맞는 듯한 정신적 고통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여기까지 그만’이라고 순간 소리친 표현 속에는 더 이상 세상의 물결에 밀려 떠내려 무리하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순간 나는 어떤가 하는 상념이 떠올랐다. 변호사인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변호사의 역할을 30년 해온 나역시 ‘여기까지 그만’이라고 선언할 때가 없었던가. 젊은 날 한 달이 지나도 사건의뢰가 들어오지 않는 때가 있었다. 직원 월급도 주고 임대료도 내고 가족들이 밥을 먹고 살아야 했다. 아이들을 학원에도 보내야 했다. 몇 푼의 돈이라는 낚시 바늘에 꿰어 사기꾼, 도둑놈, 마약범, 강도, 조폭, 살인범들의 얘기를 한 없이 들어주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들보다 더 힘든 건 한없이 건방진 졸부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인지 배웠다고 생각하는 변호사를 일부러 머슴 부리듯 하는 것 같았다. 몸도 영혼도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찢어져야 하는 지에 대해 자문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여기까지 그만’이라고 속으로 외쳤다. 가난이 운명이라면 정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는 없었다. 가난한 자의 역할도 하나님이 준 세상무대의 배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마음먹었다. 여기까지 그만이 남보다 더 빨랐다. 그러고 보니 몇 번의 그런 기회가 있었다.
30대 중반 잠시 공무원을 한 적이 있었다. 권한을 행사하는 공직은 갑의 위치였다. 그리고 안정된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승진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막상 들어가 보니 단번에 숨이 막혔다. 보이지 않는 가로세로 관료사회의 틀 속에서 오직 인생의 목적이 진급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삼십대 말의 어느 날 ‘여기까지 그만’하고 사표를 내고나왔다. 출세를 포기한 순간이었다.
방송국 쪽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화면의 화려함과는 전혀 달랐다. 뜨거운 조명과 비릿한 냄새가 감도는 스튜디오는 부자연스러웠다. 거기서 검은 카메라가 무표정하게 뜬 눈을 향해 사람들은 미소 짓고 자연스럽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사회자는 방긋방긋 미소 짓는 마네킹 같았다. 그 마네킹들이 세상에 나오면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고 감탄을 했다.
예전에는 돌이나 나무로 된 우상을 만들고 환호했다. 지금은 피와 살이 있는 마네킹을 사람들은 우상으로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보는 텔레비전 화면속의 주인공인 그녀의 외침은 더 이상 남에게 행복을 가장하는 마네킹은 그만하겠다는 선언같이 내게 들려왔다. 화면속의 그녀가 서울나들이로 나섰다. 잠시 후 연극공연장이 많은 대학로의 한 골목에 그녀가 나타났다. 그때 저쪽에서 낯이 익은 한 오십대 말쯤의 여자가 나타났다. 더러 텔레비전에 조역으로 출연하던 얼굴이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두 탈랜트의 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길거리 호떡을 파는 트럭에서 공연 중인 연극단원들에게 줄 호떡을 봉지에 싸들고 간다.
내 본 모습은 이래,하고 부자집 시어머니역할을 하던 탈랜트가 말한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이 어느 순간 증발하고 잎을 다 떨구어 버린 늦가을 나무 같은 나를 발견한다. 삼십대의 나는 육십대 중반의 지금을 상상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그만’하고 일찍 포기한 일들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 없는 마네킹의 삶을 살기 싫었으니까. 이건 단순히 내 시각에서 나는 그렇게 느꼈다는 주관적인 사견일 뿐이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