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서 인지 성욕을 자극하기는커녕 혐오감 때문에 오히려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명문대 교수가 그런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감옥에 들어간다는 게 파격으로 보였다. 민주화운동도 아니고 독립운동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술적 순교자라고 보기도 찝찝했다. 그가 근무한 연세대에 나와 고교동기가 교수로 있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마광수교수의 방이 내 방과 가까이 있어서 우연히 보게 됐는데 마 교수가 세상이 인식하는 것 같이 그런 야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내가 보기에는 다른 교수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끼니때가 되면 혼자 컵라면을 먹더라구. 성실하고 소심한 사람 같아 보여.”
1999년경 한 출판사가 마광수교수와 내가 ‘이혼’문제에 대해 공동 집필로 책을 낼 것을 제의했다. 마광수 교수는 ‘사랑, 이별, 결혼, 이혼, 고독등에 대하여’라는 글을 쓴다고 했다. 그의 원고를 보았다. 솔직한 자기고백이었다. 그중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있었다. 그 내용을 대충 간추리면 이랬다.
‘나는 주로 글 쓰는 일을 핑계로 일요일이든 연휴든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원고지의 칸을 메워 나가는 게 정해진 일과처럼 되어 있다. 정말 단조로운 노동의 연속이다. 남들은 내가 연애얘기나 성에 관한 얘기를 많이 쓰니까 아주 재미있고 신나게 일상을 때워가는 줄 아는데 정 반대다.
나는 하루에 담배를 세 갑씩이나 피우고 매일 저녁마다 혼자서 어김없이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다. 그런 인생관을 가지고 비사교적으로 살아가다 보니 자연 관능적 상상력이 발달하게 됐다. 그리고 비현실적 공상에 빠져드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야하고 과장적인 ‘꿈’과 ‘일탈’을 담은 시나 수필, 소설을 많이 쓰게 됐는데 문학이 허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구속도 되고 꽤나 시달림을 받았다. 거세게 비난하는 분들이 지적하는 것 같이 내 작품세계가 비현실적이고 변태적인 백일몽의 산물이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작가의 경우라면 야한 연애소설이나 솔직한 고백소설을 쓰기보다 교훈적 이념소설이나 종교소설 또는 민족대하소설을 써서 ‘글쟁이’가 아닌 ‘지도층 인사’가 되고 싶어 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현학적인 포장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다. 나는 보수적 권위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하며 수구적 봉건윤리와 맞서 싸워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1985년12월에 결혼해서 1990년1월에 이혼했다. 오랫동안의 교제 끝에 벼르고 별러 한 결혼이었지만 잘 맞지 않았다. 2년 만에 별거를 하면서 창피하고 고통스러웠다. 어렵게 맺어진 소중한 인연의 끈을 하루아침에 잘라버린다는 것은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었다. 가수 패티김과 길옥윤 두 사람은 이혼한 후에도 계속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 ‘색’을 마음껏 포식해 본 적이 없다. 담배나 술처럼 항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돈을 주고 여자를 산다고 해봤자 뒷맛이 찝찝하기 마련이어서 나는 늘 색에 굶주린 상태에 있다. 나는 연애를 못하고 있다. 내가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은 모두 유부녀들 뿐이다. 젊은 여성들은 나이가 많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대학교에서 많은 여대생을 상대하고 있으니까 혹시 여학생들 중에서 나를 흠모하여 따라다니는 학생이 많은 줄 안다. 그렇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요즘 여대생들은 절대로 선생을 이성으로 흠모하거나 짝사랑 하지 않는다. 주변에 쌔고 쌘 게 남학생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여자는 없다. 머리털이 미친 듯이 숭숭 빠져나가고 있는 나는 연애를 단념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쓰는 문학작품들의 내용이 과장적으로 에로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안 되면 상상으로라도 충족시켜야 하는 게 사랑이니까 말이다. 나 자신의 경우 문학을 통해 ‘사랑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럭저럭 대리충족감을 맛보면서 외로운 나날들을 지탱해나갔다. 사실 내게 가장 즐거웠던 일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나를 따라주고 격려해 주며 즐거운 사라 이후 복직운동을 열심히 해 준 젊은 학생들을 대하는 강의시간에 나는 진정한 기쁨을 맛보며 보람을 느꼈다. 선생으로서 또 작가로서 걸어간 나의 인생은 이만하면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해 늦가을 저녁 책이 나온 날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마광수교수를 만났다. 음식점 벽에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은 그의 모습에서 나는 강가에 혼자 외롭게 서서 시간을 쪼아 먹고 있는 두루미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작은 머리에 붙은 길고 뾰족한 코는 두루미의 부리 같은 느낌이었다. 작은 그의 눈은 겁먹은 새의 눈 같았다. 그는 사람을 대하면서 서먹해 하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자신에 대한 인상과 이름을 버거워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에게 친구교수에게서 들은 얘기를 전해 주었다.
“마교수님과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제 친구예요.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마광수교수는 야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내가 들은 말을 전해 주었다. 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말 들으니까 정말 감사하네요. 내가 왕따 당하고 있는데. 다음에 그 교수님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 겠어요.”
그의 눈까지 촉촉해 지는 것 같았다.
“구치소 생활은 어땠어요? 고생했죠?”
“담요에서 먼지가 너무 많이 나와서 고생했어요.”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이 좀 열린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그가 이런 말도 해 주었다.
“저는 원고를 써내고 돈을 받지 못하는 사기를 워낙 여러 번 당해서 선불을 받지 않으면 안 써요.”
그가 잠시 말을 중단하고 내게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지금 앞에 예쁘지도 않은 사나운 여기자가 버티고 관찰하고 있어서 마음대로 말도 못하고 있어요. 가면 얘기해요”
반어법의 농담이 섞인 듯한 말이었다. 그게 그날 이차로 간 까페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 여성 기자는 미인이었다. 그가 퇴직을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음 저쪽의 세계로 성큼 건너갔다. 늦가을 강가에 혼자 외롭게 서 있던 두루미가 훨훨 밤하늘로 날아가듯이 그의 영혼이 간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이 다시 사람들의 입술 위에 올려지고 있다. 자유로운 관능을 추구한 그의 작품은 사회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음란물의 바다 속에서 왜 그의 작품만 사회를 아프게 했을까. 왜 그만 감옥에 갔을까. 명문 대학교수였기 때문일까. 그의 참 모습은 허구의 작품속의 야한 주인공이 아니라 학생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허구의 작품속의 주인공을 작가와 착각해 손가락질 하고 감옥까지 보낸 내는 게 정말 정의였을까는 잘 모르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