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기업의 대형 백화점에 근무했는데 왜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까?”
선배 변호사가 물었다.
“영업을 담당했습니다. 빨리 대리로 승진했고 임원도 멀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삶의 가치관 자체가 달라지겠구나 하는 회의가 일었습니다.”
“왜죠?”
“대형백화점의 직원으로 있으니까 시스템상 계속 갑질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입점을 시키고 뒷돈을 받고 실적 없다고 쫓아내거나 협력업체에 무리한 목표를 부여하고 그게 되지 않으면 탈락시키는 행위가 모두 사실은 공정거래법위반인 겁니다. 직원으로 회사에 충성하는 행동이 세상에서는 나쁜 짓인 이중구조였습니다. 그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쓰고 나와서 로스쿨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요즈음 일자리를 얻기 힘든 세상에 명문대를 졸업한 것도 직장을 얻은 것도 좋은 것 아니었습니까?”
노 변호사가 물었다.
“쉽게 얻은 직장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렸는데 백군데 기업체에 지원했고 아예 서류전형에서 여든 여섯 번을 떨어졌습니다. 왜 떨어졌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서류전형을 통과해도 면접에서 이유도 없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아흔 일곱 번째는 서류와 실무진 면접을 통과했었죠. 마지막으로 임원면접만 남았을 때 였습니다. 마침 인사과직원이 대학 때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제가 사실상 지원자 중에 모든 성적이 일등이라고 했어요. 회장 앞에서 막말로 똥을 싸는 추태만 부리지 않는 한 합격이 틀림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면접날 가 보니까 회장님이 나한테는 단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는 겁니다. 이력서에 적힌 초중고교시설 직선제 전체 학생회장을 하고 대학교에서도 학생대표를 한 게 저한테는 자랑이었는데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떨어졌죠. 나중에 간접적으로 알아보니까 제 인상이 고분고분해 보이지 않고 선동해서 노조투쟁을 할 것 같기 때문에 탈락시킨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위에서 눈높이를 낮추라고 해서 한 단계 낮은 기업들에 지원했는데도 역시 떨어졌어요. 정말 사회가 나를 요구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이 사회의 경계인내지 주변인에 불과한가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대형백화점 직원으로 채용이 됐었죠.”
“자란 환경은 어떻습니까? 사표를 써도 먹고 살만 했습니까?”
노변호사가 물었다.
“아버지는 무학에 전라도 깡촌에서 남의 논을 소작하고 겨울에는 목수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모은 돈으로 논 한마지기를 샀을 때였죠. 아버지가 참 좋아했는데 누나의 사고로 그 논을 곧 처분해야 했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공사판 못에 찔려 그 독이 올라 돌아가셨죠. 어머니는 시골에서 품팔이로 우리 오남매를 먹여 살리셨죠. 처절한 삶이었어요.”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응어리가 느껴졌다. 그 응어리를 보고 회장은 그를 채용하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내가 끼어들어 물었다.
“세상에 분노한 적은 없습니까?”
“있었습니다. 어릴 적 한번은 높은 사람들이 방송에서 말하는 게 나오는데 가난의 원인은 게으름이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반발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남의 밭에 가서 품을 팔고 받는 게 돈 이 만원이었어요. 가난을 게으름 때문이라고 한 그 사람들에게 정말 화가 났었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번질거리는지 몰라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서민의 마음을 알까 의문이었죠.”
“그 환경에서 공부는 어떻게 했죠?”
노변호사가 물었다.
“아이들 모두 학원에 다니는 속에서 혼자 공부했습니다. 책 한권이라도 혼자 반복하는 방법으로 중학교도 수석졸업하고 고등학교도 수석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도 합격했습니다. 가난 편모슬하의 가정의 고단함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를 몸으로 겪어 봤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저의 삶을 역경이라고 표현하는 데 그 글자를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이력서 끝에 그가 헌법소원을 신청한 서류가 붙어 있었다. 그가 로스쿨을 졸업하면서 변호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대답을 요구한 서류였다.
“이 헌법소원은 뭡니까?”
노변호사가 물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정에 나가 방청을 한 적이 있는데 시신 없는 살인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이었습니다. 거기서 피고인의 가족을 만났는데 돈이 없는 그 사람들은 제가 변호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저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로스쿨출신 변호사는 일정기간 사건도 맡을 수 없고 구치소에 가서 접견도 할 수 없도록 한 겁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헌법소원을 한 겁니다.”
“설사 그 헌법재판에서 이긴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리니까 본인이 혜택을 받는 건 아니잖아요?”
선배변호사가 되물었다.
“부당한 걸 뻔히 알고 가만히 있는 건 법을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물론 내가 이익을 보는 건 아니지만 다른 후배 변호사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거 아닐까요. 제가 로스쿨에 들어가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건 우리 어머니 같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도 법을 이용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거 였어요. 노숙자를 위해 봉사할 변호사를 찾는다는 인테넷 공고를 보고 생각해 보니까 노숙자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변호사가 나 말고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의 역경이 이런 일에는 장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청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처절한 환경 속에서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증오가 에너지일수도 있었다.
“한가지 만 묻겠습니다.”
내가 아들 같은 청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부딪치고 내가 무력하다고 생각할 때 당신의 시각은 수평적입니까 수직적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역시 평생 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벽에 부딪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서민을 위한다는 막연한 관념으로 진심을 쏟았는데 그들이 더 교활하기도 했습니다. 철벽같은 시스템의 한계에 부닥쳐 부서지기도 했습니다. 수평적 시각으로 인간이나 제도를 보면 분노와 증오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면 그렇지 않았죠. 내가 다 할라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소명만큼만 하면 된다는 의식이었으니까요. 당신의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
청년은 침묵했다.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역경과 용기가 침묵의 체로 여과되어 사랑의 에너지로 승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엄상익 변호사